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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03.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영혼을 죽인 연명치료

 새벽 4시, 다급하게 울리는 전화 벨소리……. 그런데 난 듣지 못했다. 진동으로 해놓고 잤으니까. 아침에 일어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랴부랴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엄마의 위중함을 알리고자 언니가 전화를 한 것이다. 언니는 곧바로 119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향했고, 나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서둘러서 병원으로 향했다. 지금도 그 당시 상황들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진다. 엄마를 보러 응급실로 뛰어 들어갈 때 느꼈던 불안감과 초조함이 내 심장을 한없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소 호흡기를 낀 채 차디찬 응급실에 누워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고 진정시키려고 해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결국 응급실 내 통곡으로 이어졌다  


 “엄마, 괜찮아? 엄마.. 엄마..”


 산소 호흡기에 겨우 의지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엄마를 향해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그 당시 푹푹 찌는 무더위로 인해 에어컨을 세게 가동한 탓에 응급실 안은 마치 시베리아 같았다. 난 행여나 엄마에게 한기가 느껴질까 싶어 팔과 다리를 계속 주무르면서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때 의식이 없었던 엄마가 다시 의식을 찾기 시작했고, 난 계속해서 “엄마, 사랑해.”라고 외쳤다. 그동안 입안에서만 맴돌았던 “엄마, 사랑해.”라는 말! 그 꼭꼭 감춰두었던 말을 이제는 원 없이 하고 싶었다.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을 것 같은 뻥 뚫린 가슴속을 “엄마, 사랑해.”라는 말로라도 꽉꽉 채워 넣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외쳤을까? 엄마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 순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내 가슴을 쥐어짜기 시작했고, 주먹으로라도 가슴을 치지 않으면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밖에서 보호자를 불렀고……. 언니와 난 급히 달려 나가 담당의사로부터 검사 결과를 통보받았다. 복수로 인한 간성혼수에, 위암 말기라는 진단! 아마도 4일을 넘기지 못할 수 있으니 가능한 한 주변 친척들에게 빨리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병원에 오지 않았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오고 싶었다. 정말 간절히 오고 싶었다. 하지만 죽어도 병원에 가기 싫다는 엄마의 완고한 고집에는 그 누구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엄마에게 있어서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 아닌 사람을 죽이는 곳이라는 인식이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동안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는 그 의사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가족이 아닌 이상 말을 쉽게 내뱉는 것도 삼가야 한다. 여하튼 그 슬픈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미국에 있는 남동생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수화기 너머로 겨우겨우 엄마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이후 친척 분들, 주변 지인들에게 순차적으로 연락을 취한 후 마지막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엄마가 이 세상과의 끈을 놓는 그 순간까지 옆에서 지켜주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연명치료에도 동의를 했다. 그렇게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진 엄마는 다소 상태가 좋아지는 듯 의사 전달도 어느 정도 가능해졌고, 산소 호흡기도 대형에서 소형으로 교체를 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그것마저 불편했는지 자꾸만 떼려고 했다. 사실 자가 호흡이 아닌 기계를 통해 호흡을 유도해 내는 것이었기에 그 힘든 정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차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솔직히 내 생각 같아선 그 불편한 산소 호흡기를 다 떼어버리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병원 내 규정상 그럴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게다가 무척이나 갈증을 느끼는 엄마에게 입을 통해 물을 마시게 하면 자칫 폐로 들어갈 수 있으니 젖은 가제 손수건으로 입만 적시어 주라는 것이다. 정말이지 답답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마저도 엄마는 수많은 규제와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할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 미국에서 남동생이 도착했다. 그런데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얼굴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리고 친척 분들은 이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엄마를 보러 와서는 그냥 조용히 얼굴만 바라보는가 하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지난 추억들을 얘기하면서 엄마의 손을 꼭 잡아주기도 했다. 그 광경들을 보고 있었던 난 너무 무서웠다. 엄마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이…….


 우리 가족들은 낮과 밤을 교대로 엄마를 보살폈다. 수시로 기저귀도 갈아줘야 했고, 욕창이 생길 수 있으니 자세도 바꿔줘야 했다. 또한 극심한 통증을 느낄 시에는 곧바로 간호사를 불러서 진통제를 놔 달라고 해야 했다. 진통제도 그냥 일반 진통제가 아닌 ‘모르핀’이라는 마약 성분의 진통제라고 들었다. 그만큼 통증이 극심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정말이지 지켜보는 사람도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정작 엄마 자신은 얼마나 힘이 들까 싶었다. 특히 적막감이 감도는 깊은 밤엔 엄마의 그 아픈 신음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우곤 했다. 그렇다고 엄마는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냥 그 고통을 온몸으로 참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그동안 참을 만큼 참고 살았으니 이제는 아프다고, 죽겠다고 소리라도 지르면 좋으련만 엄마는 마지막까지도 조용히 인내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 한 마디밖에 없었다.  


 “엄마, 사랑해.”


 엄마가 중환자실로 옮겨진지 어느덧 사흘째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형제들은 엄마가 힘들까 봐 말을 최대한 아꼈다. 엄마의 몸에는 갖가지 의료기기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코에는 소형 산소호흡기가, 배에는 복수를 빼내는 커다란 주사기가, 팔에는 수액 주삿바늘과 수혈 주삿바늘이, 그리고 온몸에 연결된 수많은 선들은 엄마의 몸 상태를 측정하는 커다란 의료기기와 곧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 방향으로만 누워있는 엄마의 자세를 때때로 바꿔주지 않으면 욕창이 생길 수 있기에 그 모든 연결된 것들은 그야말로 걸림돌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당시 엄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실험대에 올려진 마루타 같다고나 할까? 솔직히 엄마의 그 모습이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아니,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엄마 옆에서 늘 간호를 해주던 난, 그날도 어김없이 엄마의 자세를 바꿔주려고 몸을 옆으로 돌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엄마의 입에서 팥죽색과 비슷한 다량의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난 너무 놀라 간호사를 불렀고, 뒷수습 후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 간호사는 위액인 것 같다며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했다. 아! 정말 답답했다. 담당의사는 얼굴 보는 것조차 힘들었고, 간호사 역시 내가 부르면 올까 자주 들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궁금한 것에 대해서도 딱히 정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때 난 너무 화가 나서 간호사에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이게 사람 꼴이냐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연명치료도 안 받았을 겁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네요.”


 중환자실로 옮겨진지 나흘째였다. 엄마의 눈빛은 점차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고, 양손은 허공에 대고 무언가를 쫓아내는 듯 보였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어봤더니 검정고무신이 자신을 향해 날아든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날카로운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 아려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동안 중환자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연명치료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죄책감이 드는 걸까?’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차라리 중환자실로 옮겨지기 이전의 모습으로 엄마를 보내드렸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영양 섭취는 수액으로 대신하고, 부족한 피는 수혈로 대신하면서 생명의 연장은 어느 정도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의식이 있었던 엄마에겐 그 모든 행위들이 죽을 만큼의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 난 깨달았다. 말기암 환자에게는 연명치료가 다 부질없다는 사실을. 물론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최대한 생명을 연장시키고 싶겠지만 내가 옆에서 경험한 바로는 오히려 당사자에게 고통만 안겨줄 뿐이다. 차라리 남은 시간 동안 가족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의 삶을 안히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연명치료가 아니더라도 죽음 앞에선 당연히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래도 온갖 의료기기들과의 전쟁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가족들이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아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의 엄마는 중환자실로 옮겨진지 나흘째 되던 저녁, 가족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홀로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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