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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07.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정직한 엄마는 새빨간 거짓말쟁이

 운전을 하다 보면 차창 문틈 사이로 담배꽁초를 “휙” 하고 투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나를 향해 내던진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몰상식한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불쾌하기 짝이 없다. 당장 쫓아가서 그 사람의 낯짝이라도 한번 봤으면 싶지만 차창은 새까맣게 선팅되어 있어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도 없다. 물론 이 같은 일들은 우리네 일상 속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그만큼 깨끗한 거리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뿌리 박혀있다는 것일 게다. 각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인들의 얘기를 들어 봐도 도심 곳곳이라든지 공중시설 등에 있어서 한국처럼 깨끗한 나라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정말이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1970년대만 해도 길거리에는 동물들의 배설물, 씹다 버린 껌, 다 먹은 과자 봉지, 신문지 등 온갖 쓰레기들이 난무했고, 그런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자체도 그저 당연한 거였다. 심지어는 이곳저곳에 노상방뇨하는 사람, 침 뱉는 사람, 코 푸는 사람 등등 지금으로선 절대 용납이 되지 않는 무례한 사람들도 참 많았는데. 그땐 그런 모습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난 초등학생으로서, 어른들의 그러한 행동들을 보면서 자라온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깨끗함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그 시절, 그 먼 기억 속의 나의 엄마는 달라도 참 많이 달랐다. 외출 후 집에 오면 손에는 늘 쓰레기가 쥐어져 있었다. 아마도 길을 걷다가 주변에 나뒹구는 쓰레기가 있으면 그 즉시 주워서 집으로 가져왔던 것 같다. 그리고는 우리 집 쓰레기통에다가 죄다 갖다 버리곤 했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엄마의 그런 행동들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를 줍는다는 것보다는 길거리에다가 쓰레기를 버리는 게 더 당연시되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넘쳐나는 쓰레기로 인해 이후 여러 가지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결국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이 환경은 그냥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약 40여 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 점차 변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여하튼 나의 엄마는 자식들에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고, 만약 버렸으면 다시 줍도록 항상 교육을 시켜왔다. 물론 그 당시로서는 엄마의 그런 행동들이 몹시 귀찮게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바르고 정직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형제들은 지금까지도 그런 엄마의 모습들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 솔직히 어릴 때는 엄마에 대해서 딱히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그때 우리 형제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엄마의 모습이 있었다. 그건 바로 정직하고 바른 엄마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자식들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 사실은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는 늘 먹고 싶었던 게 딱히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먹거리가 풍요롭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제과점 빵이라든지 아이스크림이라든지 과자라든지 흔하게 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시중에는 ‘누가바’라는 아이스크림이 판매되고 있다. 그런데 40여 년 전에도 누가바는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역사도 참 오래되긴 했다. 여하튼 특별한 날이면 그 아이스크림을 먹곤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난 안 먹어도 되니까 너희들이나 맛있게 먹으렴.” 하며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또한 빵이든 과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 당시로서는 밥 빼고 이러한 음식들은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기에 분명 먹고 싶기도 할 텐데, 엄마는 그런 음식들 앞에서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난 그때마다 생각했다. ‘엄마는 참 이상해. 왜 먹고 싶은 게 없는 거지?’라고.


 그런 생각은 매끼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에게 밥을 수북이 다 퍼주고, 정작 당신의 밥을 풀 때는 밥통의 바닥까지 박박 긁어도 반 그릇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어! 엄마 밥은 별로 없네?”라는 자식들의 걱정 어린 말에 엄마는 늘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희들이나 어서 먹으렴.” 하고 안도의 답변을 해주곤 했다. 게다가 밥은 고사하고 우리들이 먹고 남긴 반찬으로 그 반 그릇 정도의 밥을 해결하는 게 다반사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정도의 식사량으로 남편 뒷바라지에, 세 자녀 양육에, 집안 살림까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냈을까 싶다.


 그땐 몰랐다. 엄마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었는지…….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6년이 넘어서고 있는 지금, 난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 남매를 키우는 엄마가 되어 있다. 지금껏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자부할 수 있었던 것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단 한 번도 아이들의 배를 곯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바꾸어 말해서 아이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늘 신경을 썼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음식, 특히 ‘밥’이라는 게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닌 따뜻한 영혼을 위한 양식으로써 말이다. 게다가 내 아이들이 무엇이든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 잘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엄마라는 사람은 배가 불렀다.


 그런데 엄마도 사람이다. 때때로 아이들이 값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면 나도 먹고 싶다. 그렇다고 엄마라는 존재가 값비싼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가장 먼저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고 엄마는 항상 마지막이다. 따라서 엄마라는 존재는 없으면 그냥 못 먹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그런 부인이 안쓰러운 나머지 특별한 음식을 사 와서 몰래 숨겨두고 먹으라고 하고, 아이들 몰래 그럴싸한 외식을 시켜주는 경우도 있다. 나도 종종 그랬으니까 말이다. 여하튼 나도 엄마가 되고 보니 맛있는 게 있으면 가장 먼저 아이들부터 챙기게 되고, 내 몫까지 돌아오지 못할 경우엔 그냥 “엄마는 괜찮으니까 너희들이나 많이 먹어.”라는 말부터 나오게 된다. 하지만 솔직히 괜찮지만은 않다. 나도 먹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니까.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당시 엄마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아마 나의 엄마도 자식들이 맛있는 것을 먹고 있을 때면 똑같이 먹고 싶었을 게다. 다만,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참아야 했고, 자신보다는 자식을 위한 마음이 더 우선시되었기에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 그 옛날, 우리 형제들이 누가바를 입에다가 하나씩 물고 있을 때, 엄마 자신은 안 먹어도 괜찮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 집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냉동실에 누가바가 딱 두 개 있었는데, 두 녀석이 얼른 낚아채는 바람에 내 몫은 없었다. 솔직히 그때 나도 너무 먹고 싶어서 아이들 것을 한 번씩 베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난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참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정직했던 나의 엄마의 새빨간 거짓말이 드러날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진행형이긴 한데, 두 녀석의 등을 긁어주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틈만 나면 여기저기를 긁어달라고 보챈다. 몸이 가려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엄마의 손길이 그리운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첫째 딸아이 같은 경우, 아토피도 있는 데다가 사춘기로 인해 많이 힘들어할 때 시원하게 등을 긁어주면서 그 고비를 무사히 넘겨온 부분도 있다. 게다가 그 지긋지긋한 잠을 깨워주는 데도 큰 효과가 있었다. 사실 긁어준다고 표현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오랜 시간 동안, 그것도 만족할 때까지 긁어준다는 것은 거의 중노동이나 다름없다. 그냥 성의 없이 대충 긁어주면 아이는 그것을 금세 알아채기 때문에 서로 간의 유대 관계 형성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손끝이 아프고, 온몸이 욱신거려도 정성을 다해 온몸 이곳저곳을 긁어주곤 한다. 그것도 많게는 30분 이상. 솔직히 그렇게 긁어주다 보면 나중엔 녹초가 다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지금에서야 긁어주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렇지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아이에게 짜증을 낸 적많았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서로 간의 관계만 더 나빠질 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 생각했다. ‘그래도 난 엄마니까 내 아이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다면 그까짓 몸이 좀 힘들더라도 참고 시원하게 긁어주자.’라고. 다만, 엄마로서의 수양이 좀 덜 됐는지 힘든 만큼 아이에게 말로 생색을 내기도 한다. “엄마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그런데 예전엔 반대로 내가 엄마에게 등을 대주는 입장이었다. 그 당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상하게도 엄마의 손길이 무척 그리웠다. 그래서 거의 매일같이 등을 긁어달라고 보챘던 기억이 난다. 그럼 엄마는 지금의 나처럼 전혀 생색내지 않은 채 그냥 묵묵히 내가 원하는 대로 이곳저곳을 긁어주곤 했다. 특히 엄마의 손은 마치 거칠거칠한 나무껍질 같아서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 가슴이 아프다. 물을 하도 많이 만져서 손가락 끝이 갈라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참아내며 내 등을 긁어줬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엄마가 힘들까 봐 “괜찮아?”라고 물어보긴 했지만 늘 대답은 “괜찮아.”였다. 아마도 갈라진 손이 아려서, 너무 아려서 아예 무감각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정직했던 나의 엄마는 새빨간 거짓말쟁이로 하루하루 고된 삶을 살아냈던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 비록 자식들을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고 살았지만 그게 악의가 아닌 선의로 했던 거짓말이었기에 자식들은 지금도 그런 엄마를 잊지 못한 채 평생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며 나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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