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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08.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배부른 기레기의 주린 영혼

 참 암담했었다. 개인 부도도 아닌 나라가 통째로 부도를 맞이할 뻔했던 IMF사태. 1997년 12월, 겨울의 시작과 함께 우리 사회도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동안 멀쩡해 보였던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는가 하면, 그나마 살아남은 기업들조차도 경영 위기를 맞이하면서 대량 해고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실직자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넘쳐나는 그런 최악의 상황들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특히 경기를 가장 많이 타는 출판업계는 그야말로 쑥대밭이나 다름없었다. 내로라하는 대형 출판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을 닫는 곳들이 많았다.


 그 당시 난 사회에 거의 첫발을 내딛는 시기였다. 첫발이니만큼 좋은 자리, 안전한 자리로 내딛고 싶었다. 그런데 꽁꽁 얼어붙은 사회는 그런 나를 따뜻하게 받아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난 글을 쓰고 싶었다. 기자 생활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글로 널리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신문사와 잡지사에 문을 두드렸고, 이후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만 했다. 늘 그렇듯 초조한 기다림 뒤에는 언제나 실망스러운 결과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지금 이 코로나 시국에 취업을 앞두고 있는 젊은이들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은 사회로 나갈 준비가 다 되어 있지만 정작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담아낼 수 있는 커다란 그릇이 되어줄 수 없다는 막막함이라고 할까!


 그렇게 IMF는 일 하고 싶은 사람들, 나아가 생계유지를 위해서 꼭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절망의 시기였다. 나 역시 그 절망의 늪에서 한동안 허우적거렸고, 몸과 마음이 거의 지쳐갈 때쯤 모 신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신문사는 격주간 신문사로서 이제 막 신설된 소규모의 회사였다. 어찌 됐건 그 당시로서는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기에 아쉬운 대로 그냥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경험들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처음 인연이 닿은 곳으로 마음을 정한 부분도 있었다.


 첫 출근 날, 신문사에는 꽤 많은 기자들이 나와 있었다. 다들 첫 출근이었고, 대부분 남자 기자들이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신문사라서 그런지 분위기는 몹시 어수선했고, 또한 서로 초면이다 보니 어색함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다소 편안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서로 간의 대화가 오고 갔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다 보니 다들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었다. 그중 한 기자는 잘 나가던 잡지사가 IMF로 인해 문을 닫는 바람에 덩달아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또 한 기자는 글이 너무 쓰고 싶어서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신문사에 문을 두드리게 된 경우였다. 그 밖에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잡지사, 신문사의 부도로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몇몇 기자들도 있었다.


 다들 나름대로의 사연을 품은 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고 모 신문사로 모여든 기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신문사가 추구하는 콘셉트에 맞게 정보를 구하고, 대상을 선정하고,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편집을 하면서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시기적으로 무척 힘들었던 탓에 막 창간된 신문사의 체계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간혹 가다가 사진 기자가 부족하면 취재 기자가 사진 기자가 되기도 하고, 취재기자가 취재, 사진의 역할을 동시에 맡는 경우도 생겼다. 여하튼 그때 한 솥밥을 먹게 된 기자들은 모 신문사의 창립 멤버들로서 그나마 질 좋은 신문을 만들어 내고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창간된 지 세 달이 되어갈 무렵이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신문에서 서서히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 시작 단계에서도 꺼림칙한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아예 대놓고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기자라는 건 사실 그대로를 글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생생한 정보를 전해줘야 하는데, 왠지 대표와 편집부장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듯한 불쾌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신문에 실리는 광고와 해당 업체의 기사가 함께 나가는 식이었다. 처음엔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뻔히 드러나는 속셈에 기자들도 한계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리 신문에 광고 의뢰하면 기사 써줄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생전략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기사 작성에 있어서도 마감 때면 항상 문제가 발생했다. 기자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편집부장의 글쓰기 능력이었다. 언젠가 한 번 편집부장이 쓴 글을 읽다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빨간 볼펜으로 말이 되게끔 교정을 하고 있었다. 문장 자체도 어색한 부분이 너무 많았고, 각 단락의 연결도 너무 부자연스러운 나머지 나중엔 화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했다. 그냥 단순히 교정 수준을 넘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날이 최종 마감 날이었는데……. 여하튼 빨간 볼펜으로 교정해놓은 원고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거의 딸기밭 수준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편집부장이 수시로 내 옆에 와서는 누가 들을세라 조용한 목소리로 “그만 좀 고쳐.”라고 하면서 팔꿈치로 내 팔을 콕콕 찔러댔다. 처음엔 그냥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자존심이 무척 상했는지 계속해서 나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게 아닌가! 그래도 난 기자로서 적어도 기사 글에 대한 책임감은 가지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허락하질 않았다. 그 순간 난 큰소리로 얘기했다. “독자들이 이 기사를 보고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주변에 있던 몇몇 기자들도 크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는지 나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오곤 했다.


 가뜩이나 냄새나는 신문에 글까지 엉망인 신문! IMF 사태로 인해 수많은 업체들이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또 이와 같은 언론 매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고 있었다. 따라서 기자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한숨만 내쉬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난감해했다. 그렇다고 딱히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그 당시 사회는 수많은 실직자들로 인한 취업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기자들끼리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이가 가장 많고, 또 어린 자녀까지 둔 어느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돈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자로서 일에 대한 자부심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신문사에 계속 남아있다 보면 아마도 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무척이나 괴로워하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생생하게 전해야 할 기자가 권력의 하수인 역할만 하고 있다면 그건 기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전 이쯤 해서 그만두려고 합니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함께 약속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다음 날부터 나오지 않기로. 나 역시 다음 날 나가지 않았다. 물론 그날 아침, 편집부장으로부터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그래서 얘기했다. “제가 일할 곳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가끔 가다가 그 당시 기자들이 생각나곤 한다. 요즘 흔히 말하는 ‘기레기’, ‘기더기’의 삶이 싫어서 뛰쳐나온 기자들이기에 적어도 이후의 삶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하고도 떳떳한 모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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