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미영 Jun 09.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식 이기는 부모 있다

 우리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 나도 결혼 전에는 엄마 말이 옳든 그렇지 않든 무조건 엄마를 이겨먹으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엄마를 이겨먹어서 나에게 득 될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여하튼 내가 엄마를 바락바락 이겨먹으려고 할 때마다 엄마는 항상 조용히 져주곤 했다. 그땐 몰랐다. 엄마가 매번 왜 그랬는지.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도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 입장이 되고 보니 그 당시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솔직히 엄마를 이겨먹으면 왠지 내가 조금 더 우월해지는 느낌? 그런 나만의 희열감이라는 게 있었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을 가장 만만한 내 엄마에게 그런 식으로나마 보상받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다


 한동안 우리 가정도 남편 대 부인, 누나 대 동생의 기싸움이 아닌 부모 대 자식의 기싸움으로 냉전 상태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부모의 입장에서 남편과 내가 한편인데도 불구하고 자식 한 명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처음엔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분위기가 정말 살벌했다. “이 못된 녀석이 어디 부모한테 그딴 식으로 행동을 해.”라고 윽박지르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아이가 통제 불능의 상태에 이르자 우리 부부는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제발, 말 좀 해봐.”라고 하면서 말이다. 특히 아이의 사춘기가 극에 달하면서 우리 부부는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다만, 선택은 반드시 책임이 따라야 한다.”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아이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나름대로의 지혜였던 것이다. 그때 아이들은 책임은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의견을 부모가 받아들였다는 것에 대한 희열을 느끼곤 한다. 예전의 나처럼 말이다.


 사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엄마인 나를 절대적으로 믿고 잘 따라와 줬으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으면서 왜 이 같은 말이 나왔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이겨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후에 발생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문제다. 나도 처음엔 무조건 자식을 이겨먹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왠지 자식에게 지면 자존심도 상하고, 부모의 체면 또한 서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매번 언쟁이 생길 때마다 아이의 기를 꺾으려고 논리, 경험, 지식 따위 등을 내세워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그때마다 아이는 더 세게, 더 거칠게 반응할 뿐이었다. 급기야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그리고 아이가 다시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 정말 숨이 막히듯 답답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결코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 뜻대로 아이들을 이끌려고 하면 청개구리 심보, 즉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어지는 심리가 발동되어 정반대로 나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마다 한 편의 동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 옛날, 지독히도 말을 안 듣는 청개구리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죽음을 앞둔 엄마 청개구리가 그 아들 녀석에게 “내가 죽거든 강물에 묻어주길 바란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 이유는 평소 너무 말을 안 듣는 아들이었기에 정반대로 강물에 묻어달라고 하면 땅에 묻어줄까 싶어 그렇게 유언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엄마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지난날을 후회하며 엄마의 유언대로 강물에 묻어줬다. 따라서 엄마 청개구리는 강물에 떠내려가 버리고……. 결국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게 된 청개구리 녀석은 비만 오면 그리운 엄마 생각에 “개굴개굴” 하며 운다고 한다.    


 이 얘기는 요즘 흔히 말하는 ‘웃프다’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야 단순히 웃고 넘길 수 있겠지만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는 현실 속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매우 공감이 된다. 사실 나도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당시 내 엄마의 심정을 하나하나 이해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엄마가 나에게 매번 져 준 것도 결국 내 의견이 옳아서, 나를 믿어서가 아니라 자식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나름대로의 지혜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각의 폭도 그만큼 좁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차피 성장을 통해 깨닫게 되는 부분이라면 굳이 미리 강요해서 깨닫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 경험상, 강요는 절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우리 가정만 보더라도 남편과 첫째 딸아이의 경우, 어떤 주제를 놓고 의견이 자주 대립되곤 한다. 특히 중국 문화와 한류 문화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남편이 생각하는 것과 아이가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엔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결국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관점의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남편은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을 아이에게 강요하려는 경향이 있고, 아이 역시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이 전부인양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실 관점이란 건 시대, 경험, 지식, 생각, 가치관 등으로 인해 충분히 바뀔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모처럼 네 식구가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그날도 남편과 첫째 딸아이의 논쟁이 서서히 불붙기 시작했다. 논쟁의 주제는 늘 그렇듯 중국 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현재 아이가 고등학교에서 중국어과를 전공하고 있기에 더더욱 첨예하게 대립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여하튼 둘은 언성을 높여가며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밥상머리 교육이 아니라 밥상머리 논쟁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를 일이었다. 그때 한창 사춘기로 날이 서 있는 둘째 녀석은 화를 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나 역시 그 상황에서 밥이 맛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그 둘의 논쟁은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로 간의 언성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고, 급기야는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때 남편을 향해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는데도 불구하고 마구 덤벼드는 아이가 괘씸했는지 끝까지 아이를 이겨먹는 것이었다. 결국 아이도 분에 못 이겨 방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이후 집안에는 적막감이 감돌았고,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밥과 반찬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행복해야 할 저녁식사 자리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보기엔 남편이 아이를 이겨먹긴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 어린 자식을 이겨먹었다고 해서 과연 뭐가 남는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그날 소파에 멀뚱히 앉아있는 남편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하게 보였던 적이 없었다. 자식을 이겨먹는 부모의 모습! 그리고 그다음 날, 남편은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 애교 아닌 애교를 떨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