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의 <상수리나무 아래>
17년도쯤에 너무 재미있게 읽다가 이유 없이 중도하차 했었는데 최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왜 중단했었는지 알게 됐다. 여자주인공 맥의 상황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중단했던 부분은 공교롭게도 맥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직전이었고 그래서 나는 맥의 고통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루스라는 훌륭한 스승의 존재만으로 참아주기엔 맥이 겪은 일들이 너무 기가 막혔다. 사이코 같은 아버지의 학대, 강압적인 남편, 남편의 강압적인 행동에 주눅 들면서도 그를 떠받들며 스스로는 끝없이 낮추는 맥시의 자아. 특히 마지막이 날 괴롭혔다. 예전에 읽은 시대극 로설 속에서 끝까지 소심하고 가엾던 여주들이 생각났기 때문에 맥시의 미래에 대해 뭔가 긍정적인 것을 기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소설이 반 여성주의적이라는 평들에 속으로 약간 동의했었다.
그런데 내가 중단하고 외면했던 이야기가 보란듯이 새롭고 찬란한 가지를 펼치며 이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맥의 동기는 물론 남편이며, 우리가 로맨스 소설에서 많이 봐온듯한 중세풍의 세계관과 의처증걸린 남자주인공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그 세계에서 새롭게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을 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법사들의 탑과 마법사의 초사회적 지위를 개입시켜 그 세계에 균열을 내고, 그 틈으로 아그네스와 맥시의 성장을 뱉어냈다. 맥시는 마치 영어덜트 소설의 주인공처럼 모험하고 성장한다. 아그네스는 강압적인 남편을 견제하고 맥시를 자극하여 바깥 세상으로 끌어내는 여성 인물이다. 그리고 맥시는 아그네스의 사회적 지위를 욕망한다. 아그네스가 되고 싶어한다. 이 소설은 이러한 맥시의 욕망을 받아들인다. 로맨스라는 장르에서 남주와 여주의 결별을 죽음도, 오해도 아닌 맥시의 사회적 욕망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이 소설이 맥시의 성장을 위해 소설 안팎으로 희생시킨 것들을 생각하면 감동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리프탄과 언제 재회하느냐고 묻는수많은 성난 댓글들을 보라).
또한 맥은 남편을 위해 전장으로 뛰어드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거기서도 남편을 만나 함께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맥에게 정작 전장에서 일어난 강렬한 경험들은 남편과 상관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여사제들과 더러운 잠자리에서 부대껴 자고, 환자들을 돌보고, 소년기사들과 함께 궁지에 몰린 성을 떠나며 남은 사람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눈물을 흘린다. 결국 사람들을 완전히 외면하지 못하고 마력을 고갈 시켜 가며 마법을 써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사람들을 구한다.
게다가 이 소설이 계속해서 보여주는 메세지들-리프탄은 맥시를 가두고 싶어하지만 세상이 맥시를 필요로 하고, 맥시는 거기에 기꺼이 부응하고자 하는 장면들, 맥시는 그 부름에 답하다가 위험에 처하고 리프탄은 로맨스 소설 남자주인공 답게 법석을 떨며 맥시를 그녀를 향한 요구들로부터 격리하지만 그것이 맥시를 안전하게 만드는덴 자꾸 실패하는 장면들. 이것들은 독자들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이건 독자들 예상과 조금 다른 소설이라고. 리프탄은,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에게 결코 이 넓은 세상을 대체할 수 없다. 남자주인공은 절대자가 아니다. 그것은 두 주인공의 서로를 향한 사랑이 깊어져가면서 더 분명해진다. 리프탄은 이제 작고 상처받은 여자인 맥의 눈에도 연약해보인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이런 특별함이 이렇게 은근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어필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가령 앞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이런 장면이 있다.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의 손으로 아버지에게서 구출되는, 이 소설에서 아마 손꼽히게 극적일 순간에, 루스가 창백한 얼굴로 맥시를 바라보고, 흥분한 리프탄을 진정시키며 맥시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주던 -비교적 짧고 정적인- 장면. 그 인간적인 장면. 이 세상에 두사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맥과 리프탄에게 서로의 상호작용만이 유일한 해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그 다음, 복도로 나온 맥시와 리프탄과 기사들 앞에 어두운 복도 끝에서 나타난 로제탈. 리프탄과 기사들을 성 내부로 들인게 로제탈이라는 게 밝혀지는 장면.
이 장면 이전에 로제탈이 나온 장면은 맥시에게 네 남편을 너도 안 믿으면서 나더러 사랑을 믿으라 하지 말라, 네가 이 성으로 안 돌아왔으면 했다, 언니는 늘 나를 실망시킨다, 라고 했던 장면이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한적 있나? 로맨스 소설의 여자주인공의 무력함이 그 소설안에서 더 약자인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자극하는, 기다린줄도 모르고 기다려온 장면이 바로 그 순간 내눈앞에 나타났다. 이미 그 자체로 강력한 장면이었지만 로제탈이 (리프탄을 성 내부로 들여보내서) 맥시와 자기 자신을 구하면서 자신의 서사를 완성시킨 후엔, 아마 죽을때까지 내 머릿속에 박혀있을 장면이 되었다.
절대적인 구원자로, 모든 상황을 절단내고 종식시키는 존재인 리프탄은 물론 매력적이고 로맨스 독자로서의 니즈를 충족시켜준다. 하지만 맥시와 리프탄이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주는 인간적인 존재들이며, 둘의 사랑 또한 그 안에서 존재하여, (물론 그들은 로판 여주인공 남주인공 답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강하지만) 마치 실제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이 그렇듯이 그들도 그렇다는 사실을 설득해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장면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