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만의 <전, 란>
영화는 양반과 노비의 평등을 주장한 '조선의 사상가 정여립' 의 목이 칼에 꿰뚫린 채 시작한다. 이 잔인하고 강렬한 오프닝외에도, 판소리와 함께 오직 한 양반집의 집안일을 위해 동원되는 엄청난 수의 노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퀀스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조선의 일면이 어떤 것인지 암시한다. 조선은 노비들의 나라다. 왕은 노비들이 사람대접받는 것을 혐오할 뿐만 아니라, 극도로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어떤 위험한 진실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종묘사직' 이라는 그 이름이 강하게 주장하는 바와 달리, 사실 조선왕실은 -마치 선조 그 자신의 외모처럼- 말라비틀어진 고목같은 존재일뿐이며, 조선을 이루는 영혼은 백성, 즉 그들 중 대다수인 노비들이라는 진실이.
임진왜란은 이 진실을 폭로하며 선조를 벌거벗은 임금으로 만든 사건일 뿐이다. 영화는 일본의 침략을 다루지만, 이에 대해 너무하리만치 담담하다. 전쟁의 스펙터클과, 관객들의 민족주의적 쾌감을 위해 강조한 <명량> 같은 작품을 생각해본다면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이순신은 선조의 입을 빌려 짧게 언급될 뿐이다. "이순신은 죽었는데, 김자령은 왜 살았지?"라는 식의 말로 지나가듯 흘러간다. 그동안 임진왜란은 이순신 장군의 존재가 아니면 우리에게 기억될 필요가 없는 사건인 듯 했는데 말이다. 이 장면은 뜨겁고 매우 감성적인 특유의 역사관으로 과열된 우리의 뇌리에 서늘한 환기를 시켜주는데, 현대 한국인들에게 승리감을 안겨주는 이순신의 활약은 당시 조선에서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천영과 종려의 관계는 실제 조선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간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봐 온 조선의 노비와 양반의 관계 같기도 하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리얼리즘을 찾자면, 천영도, 종려도 자신들에게 부여된 역할과 지위를 거부하지 못한 채, 연약한 사적 우정을 끝내 지켜내지 못한 부분일 것이다. 모든 인물, 심지어 주인공인 천영조차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각본 집필에 참여했다는 박찬욱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헤어질 결심>이나 <아가씨> 속 주인공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진 강렬한 개인들이었다면, 이 영화의 인물들은 철저히 사회적 역할에 묶여 있다. 조금 더 냉소적으로 본다면, 이는 성역할의 문제일 수도 있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는 아무 이유 없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개인'인 인물이지만, 천영은 양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범한 양민으로 자랐다가 하루아침에 노비가 되어, 다른 노비들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는 보다 외부적인 설명이 있다. 물론 이는 현대와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으나, 이 역시도 외부의 사건들이나 사회적 부름에서 자유로울수 없는-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그 외부 사회의 주인공이므로, 이 세상이 그들을 애타게 찾고 부르니까-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거기서 소외되기에 어쩔수없이, 혹은 자연스럽게 사적인 개인이 되는 세계관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결말부에서 펼쳐지는 비귀, 천영, 종려 세 사람의 칼싸움은 임진왜란, 혹은 조선 역사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앞서 전개된 싸움 속에서 반복된 양반(종묘사직), 백성, 일본군 셋의 대립이 이 장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귀와 싸우던 종려가 천영이 등장하자 즉시 칼끝을 돌리는 장면은 강렬하다. 이 장면에서 백성들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던 선조의 모습과, 노비 아이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후려치던 병조참판의 모습이 겹쳐 보이지 않던가? 조선의 양반들은 백성을 다루기 위해 온 행정력과 군사력을 동원해 왔다.
이 세 사람의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칼싸움이 우습다는 평도 많지만, 나는 크게 웃기지 않았다. 다만 내게 이 장면이 우스움까진 아니어도 약간의 웃음을 불러 일으킨 이유는, 조선땅을 휩쓴 황폐한 칼바람이 외부의 정복욕이 아닌, 조선 내부의 양반과 노비의 애증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싶은 민족주의적인 욕망이 엿보였다는 점이다. 어떤 역사와 서사의 주인공이 조선 남성이었으면 하는 욕망 말이다.
그러나 역시 내게도 천영과 종려의 오해가 풀리는 장면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의 오해가 사적인 것이기만 했다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약해진 마음 앞에서 쉽게 풀릴 수 있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오해는 양반과 노비, 임금과 백성을 가르는 견고한 매듭과도 결을 같이 한다. 어쩌면 종려가 오해를 지속시킬, 혹은 지속시켜야 하는 몸뚱이에서 죽음을 통해 영영 자유로워질 것이 분명해진 찰나에 비로소 사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 영화는 조선을 노예의 나라로 냉소적으로 묘사하는 흔치 않은 사극 영화였던 것 같다. 비록 이와 관련된 칼럼이 몇 개 떠오르긴 해도, 조선의 양반과 노비의 뚜렷한 주종 관계를 이토록 불편하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다룬 사극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양반과 노비의 우정이라는 관계성을 중심에 둔 것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단순한 배신과 복수의 전개가 아닌 점도 좋았다. 사극에서 신분 차이가 극명한 동성 관계들—왕과 내시, 마님과 시종—에서 주종적인 관계성은 아무렇지 않게 유지되면서 동시에 기묘하게 얼렁뚱땅 형성되는 우정이 우스움과 위화감을 느끼게 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 영화는 그러한 점을 깔끔하게 풀어내며 마무리했다. 한국 미디어에 노출되어 오면서 내내 간지럽고 어색했던 부분을 긁어주는 영화였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