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애니메이션, <클라우스> (2019)
약 4년 전, 나는 아시아나 국제 단편영화제 관객심사단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관객심사단 선정을 위한 마지막 면접 과정에서, 면접관님이 내게 물었다. "영화를 볼 때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연출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저는 스토리가 더 중요한 것 같다"라고 답했는데, 놀랍다는 듯이 이유를 물어보셨다. "세상에 비슷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데, 그런 스토리에서 벗어나서 새로움을 선사하는 영화가 좋은 것 같다"라고 답했었는데, 이 대답을 나중에 곱씹을 수록 두고두고 후회했었다.
이미 세상엔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스토리들과 주제 의식이 가득하지만,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더 크게 깨달았던 것이다. 가족과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 연인에 대한 그리움 등등. 너무나 많은 콘텐츠들이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이미 다 해버렸기 때문에, 관객들을 사로잡기 위해선 연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내게 "세상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구나!"라고 생각해준 작품이 생겼다. 바로 넷플릭스 최초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클라우스>다.
디즈니·픽사의 3D 애니메이션에 눈이 익숙해진 사람들이라면 <클라우스>의 2D 그림체는 다소 밋밋하고 볼품 없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 다만 나처럼 지브리 스튜디오의 2D 그림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마음에 꼭 들 것이다.
<클라우스>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우정총국 재벌의 하나 뿐인 아들 '제스퍼'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가 내린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도시 '스미어렌스버그'에 떨어지며 시작한다. 제스퍼의 아버지는 1년 안에 그에게 6,000통의 편지를 처리할 것을 명령하고, 명령을 지키지 못할 시 그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 선포한다. 스미어렌스버그는 두 개의 가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예로부터 매우 사이가 좋지 않은 두 가문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을 리 만무. 제스퍼는 절망에 빠진다.
지옥과도 같은 도시를 벗어나려 제스퍼는 안간힘을 쓰지만, 이제까지 일을 하지 않고 놀고 먹기만 했던 그가 주민들이 편지를 쓰게 하기는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깊은 산 속 오두막에서 어딘가 수상한 남자 '클라우스'를 마주치게 된다.
'편지 배달'을 그저 시시하고 지루한 일로 생각하던 주인공 제스퍼와 아내를 잃고 산속에 틀어박혀 살던 클라우스. 두 사람은 협업하여 아이들에게 편지를 가져다주면 장난감을 준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새로운 장난감을 얻기 위해 아이들이 전하는 편지로 분주해지는 마을은 활기를 띄게 된다. 황량하기 그지 없던 차가운 마을에 아이들이 편지를 주고 받으며 따뜻한 온기가 마을을 감싸고, 제스퍼는 점점 아버지의 명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편지 배달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게 된다. 회색빛의 마을에 색깔이 더해지며, 이 애니메이션은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이 느끼고 싶은 따뜻함을 선사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스퍼'가 지금까지 없었던 캐릭터냐,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의미도, 목적도 없이 어떻게 보면 '악역' 같았던 주인공 캐릭터가 모종의 사건들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는 이미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인 <주먹왕 랄프>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다만 이 영화의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클라우스>라는 인물이 어떻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로 불리게 되었는지 새로운 시각을 통해 다룸으로써 아이가 아닌 나같은 어른들까지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 마을을 벗어나기 위한 이기심에서 시작했던 제스퍼의 행동이 결국 마을을 바꾸고, 자신의 마음가짐까지 바꾸게 하는 이 이야기. 그의 성장 과정과 더불어 우리가 지금 '산타클로스'라고 부르는 존재에 대한 또 다른 재해석까지, <클라우스>는 크리스마스나 연말에 우리가 흔히 찾게 되는 '따뜻하고 기분 좋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타 이야기라고? 안봐도 뻔하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아직 당신이 예상 못했던 산타 이야기가 여기 있답니다!"라고 말하는 사랑스러운 애니메이션이다.
초중반까지는 영화가 다소 어두운 톤이기 때문에, "이게 왜 크리스마스 추천 영화야?"라고 의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후반으로 향할수록 어두웠던 마을에 색이 더해지며, 보는 사람까지 흐뭇해지게 만드는 영화. 익숙지 않은 2D 그림체가 진입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일단 재생하면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멈출 수 없을 거라 감히 호언장담 해본다.
이 세상엔 여전히 내가 모르는 영화와 드라마가 많고, 그러니 내가 접하지 못한 신기하고 새로운 이야기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제 산타클로스는 너무 식상해. 새롭지 않아"라고 생각했었지만 "산타클로스로 이런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게 되다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클라우스>가 나에겐 어떻게 보면 또 다른 좋은 컨텐츠를 만나고 싶은 욕심이 들게 하는 작품이 된 것이다.
영화계에서 일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새로운 것"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온라인 마케팅 또한 새로운 영화를 시작할 때 뭔가 신선하고, 남들이 안했던 거 없나? 스스로 굉장히 많이 생각해본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일은 너무 어렵고 머리가 아프기에 "아 몰라, 세상에 새로운 게 어디있어. 남들이 다 했던 거야"라고 역설적으로 스스로에게 한계를 규정하곤 했다.
닳디 닳은 산타클로스라는 존재를 이렇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로 새롭게 풀어낸 <클라우스>를 보고 나서, 무모하게도 "나도 저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자신감도 들었었다. (하지만 아마 또 마음처럼 되지 않을 것을 안다...) 연말, 매년 재생하게 되는 <나홀로 집에>나 <해리포터> 시리즈 대신 새로운 것을 보고 싶다면 <클라우스>를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