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 짓(?)도 5년차
2021년, 새해를 맞고 곰곰히 생각해봤다. 벌써 내가 일을 시작한지 5년 차가 되었구나. 그 사이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인턴에서, 사원이 되었고, 주임이 되었다가, 현재는 대리라는 직급을 달고 일하고 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는 미친듯이 기뻤었다. 그토록 바라던 영화판에 어떻게라도 작은 숟가락을 얹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일은 너무나 어렵고 힘들다. 코로나로 인해 상황도 좋지가 않고 월급은 언제 제때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무진장 기뻤었다는 사실이다.
막 대학을 졸업하고 상경했던 2017년 2월. 나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는 백수이기에 이력서를 열심히 써서 '영화'라는 업종이기만 하면 어디든지 이력서를 넣었었다. 배급사, 제작사, 마케팅사 등등. 지금에서야 어느정도 연차가 쌓여 영화와 관련된 직업들이 어떤 것이 있고, 내 능력 안에서 취업 가능한 곳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그저 햇병아리였다.
영화가 너무나도 좋았고, 영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영화 감독을 꿈꾸며 영화 대학원을 진학할까도 생각했지만, 전공 교수님과의 상담 이후 대학원 진학은 포기했다. 사실 영화 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기도 했고, 좁디 좁은 영화판에서 제작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라는 현실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영화 말고도 관심 있는 분야가 있다면 영화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은 그렇게 추천하지 않는다는 교수님의 말에 나는 굴복했다. 대학원은 포기했지만 '영화계 종사자'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고, 몇 곳은 최종 면접까지 가기도 했지만 번번히 떨어지고야 했다.
그러던 와중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영화 온라인 마케팅 회사'였는데, 당시의 나는 온라인 마케팅, 아니, 마케팅이 뭔지도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 면접을 보러오라는 연락이었고, 나는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억누르고 열심히 면접 준비를 했던 거 같다. 자기 소개는 기본이고, 마케팅 회사였으니 최근 개봉작들 중 마케팅이 좋았던 영화, 별로였던 영화들을 나름대로 생각해서 정리를 한가득 했었다.
그 당시 회사의 사무실은 신사역 근처였는데, 갓 서울에 상경한 나는 "말로만 듣던 '가로수길'에 사무실이 있다니!" 하면서 별 것도 아닌 사실에 뽕(?)이 찼었다. (합격한 것도 아니었는데...) 시골쥐 마냥 주위를 둘러보며 도착한 사무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아담했고, 사무실에 들어간 순간 벽 한 면에 들어찬 영화 굿즈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굿즈들 사이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의 엽서도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영화 온라인 마케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영화를 마케팅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라는 마인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철딱서니 없다)
면접은 대표님과 나, 그리고 다른 분 한 명까지 해서 1:2 면접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부끄럽지만 꿋꿋하게 자기소개를 했던 거 같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좋아하는 한국 감독은 누구냐, 어떤 장르를 좋아하냐 식의 질문이었던 것 같고 당시 뭔가 '쎈' 영화에 빠져있을 때라 그런지 나홍진 감독을 좋아한다고 했었던 게 똑똑히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이해가 안가는 대답...)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질문이 들려왔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 중 마케팅이 좋았던 영화와 안 좋았던 영화를 꼽고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냐"는 질문. 열심히 준비했기에 난 차근히 대답을 했었고, 나름 만족하면서 면접을 마쳤던 것 같다. (TMI. 그 당시 마케팅이 좋았던 영화로는 <문라이트>, 별로였던 영화로는 애니메이션 <트롤>이라고 답했었다)
면접의 끝은 뭔가. 그것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2주 가까이 연락이 오지 않아서 거의 반 포기 상태였었다. 전화해서 합격자 발표가 났냐고 직접 물어볼 자신이 없어서 친구에게 대신 부탁하기도 했었다. 합격자는 개별로 연락이 갈테니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다. 그 시간들은 정말 영원과도 같이 길게 느껴졌다.
다니는 회사가 없으니 남는 게 시간이었던 취준생 나는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게임은 한 번 게임을 시작하면 핸드폰을 확인할 정신이 도통 안나는 게임인데, 정신없이 게임을 하고 있던 와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가 오고 있었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순간 받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당장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받았다. "여보세요?" 떨면서 답하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그 회사에 최종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순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떨렸던 거 같다. "감사합니다!!" PC방 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던 것 같다.
그 때부터 나에게 영화의 길은 열렸었고, 지금까지 그 길을 걷고 있다. 일을 하면서 죽도록 힘든 시간도 많았고 버티기도 너무나 힘들었지만, 다른 길을 가보려고 찾아보면 이만큼 재미있는 일이 눈에 띄지 않았다. 내 좁은 경험의 한계일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일을 하면서 행복했던 순간도, 보람찼던 순간도 많았다. 처음 출근했던 주에 새벽 두 시까지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이런 날들이 계속된다면 나는 이 일을 할 자신이 없다"라고 분명히 되뇌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결심이 무색하게도 이 길을 거의 5년 째 걷고 있다.
지금 영화계에도, 나에게도 너무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 그래도 내가 했던 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처음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이 올라갔을 때, 그 때 느꼈던 행복은 잊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영화들을 만나고 싶은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영화 마케터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코로나가 더욱 밉고 싫다. 이제는 진짜 20대 후반. 새해를 맞이하며 여러 생각이 드는 와중에도 좋은 영화를 만나고 싶다는 욕심은 여전하다. 다른 길도 뚫어볼 때가 된 것 같은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