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더 이상 '영화'를 모험하지 않는다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은 여러 직종이 있겠지만, 여행 그리고 공연 업종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며 비틀거리는 직종이 있다면 바로 영화계일 것이다. 2019년을 마무리하면서도 난 2020년을 송두리째 날릴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고, 이 업종에 종사하는 업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2017년부터 영화계에서 일을 시작한 내가 가장 바빴던 해는 2018년이었다. 2018년에 내가 마케팅에 참여한 영화는 총 26편이다. 10월에는 한 달에 다섯 편의 영화를 개봉시키면서 내가 지금 무슨 영화의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정신이 쏙 빠졌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물론 조금 더 규모가 큰 영화를 개봉시키는 곳으로 이직한 이유도 있지만 올해 내가 개봉시킨 영화는 단 6편 뿐이다. 엄청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천만 영화'라는 수식어가 붙은 영화가 등장하지 않은 해는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다. 작년만 해도 <극한직업> <어벤져스: 엔드게임> <겨울왕국 2> <알라딘> <기생충> 다섯 편이 천만 관객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터지기 직전에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이 470만 관객으로 박스오피스 1위, 그 다음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430만 관객을 기록했다. 코로나 시대 이후 개봉한 영화 중 <다만 악>이 430만 관객을 기록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성과인 것 같지만, 평소같았으면 극 성수기로 불리는 8월 개봉 시즌에 대형 배급사의 영화인 것을 감안하면 절대 높은 수치는 아니다.
몇개월 동안 극장을 살리기 위해 나라에서 6천원 쿠폰을 뿌려대던 때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지원이 모자랐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영화계 종사자들을 살리기에는 부족했다는 느낌이다. 할인을 받지 않으면 1만원이 넘어가는 멀티플렉스 극장에 더 이상 자신의 1만원을 선뜻 내놓는 관객들은 더 이상 그렇게 많지 않다. 더불어 코로나와 함께 급부상한 OTT 서비스는 프리미엄 금액권(한달 만원대)을 결제하면 최대 4명이 나눠서 볼 수 있다. 몇 천 편의 드라마와 영화를 무제한으로 감상할 수 있는데 한 달에 몇 천 원도 안든다? 굳이 사람들은 극장에 갈 이유가 없다. 가능한 시간대를 보고 예매하고, 챙겨서 극장까지 가고, 만약에 영화가 재미까지 없다면 돌아오는 길에 기분까지 나쁘다. 내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만 몇 번 까딱하면 영화를 볼 수 있는데 따로 돈까지 지불하고 에너지를 더 써가면서 영화를 보는 사람은, 요즘엔 더더욱 찾기 어렵다.
코로나로 인해 개봉 예정이었던 영화들이 개봉하지 않으니, 관객들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더욱 줄어들고 "볼 영화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극장에 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굳이 이 시국에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나중에라도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영화 평을 찾아보지 않고 극장에서 그냥 감상해봤으면 좋겠다. '가성비'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본인의 영화 취향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평을 찾아봤을 때 호평만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영화'로 꼽는 어떤 영화들도 각자의 취향, 가치관, 신념에 따라 평이 제각각이다. 더군다나 요즘 같이 인터넷, SNS가 발달하고 수많은 커뮤니티들이 있는 만큼 한 채널에서라도 영화에 대해 극단적인 평(대부분 안 좋은 쪽의 극단이 많다)이 올라오면 이미 그 영화는 '돈 주고 보기 아까운' '영화관에서 안 봐도 되는' 영화가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나는 그래서 왠만하면 영화를 보기 전 인터넷 평을 굳이 먼저 찾아보지 않는다. 누군가가 보고 나서 말을 해준다거나, 링크를 보내준다거나 하는 경우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보고 판단하자"라는 주의다. 누군가는 별로라고 해서 극장에서 보지 않다가 나중에 봤더니 좋은 경우도 있었고, 추천 받아서 봤더니 별로인 영화들도 있었다. 영화란 정말 보는 사람에 따라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컨텐츠이기 때문에 사실상 대다수의 사람들이 "쓰레기 같다"라고 칭하는 영화도 내가 봤을 때 좋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종종 듣는 이야기지만 집에서 OTT 서비스로 보는 것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몰입감'이다. "난 집에서도 몰입해서 잘 보는데요?"라면 할 말이 없지만 끊길 일 없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핸드폰/PC/태블릿을 이용해 영화를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 할지라도 중간에 밥 먹으면서 봤다가, 카카오톡 좀 했다가, 인스타그램 좀 중간에 보다가 다시 이어 보면 흐름과 감정이 끊긴다.
어디선가 본 문장인데 굉장히 공감했던 게 "행동의 제약이 습관을 만들기도 한다"라는 문장이었다. (e-book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는 글이었던 거 같다) 습관까지는 아니지만 영화관에서 우리가 당하는 행동의 제약이 완전한 몰입감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보니 별로였던 영화들도 재개봉 같은 기회로 극장에서 보면 느낌이 완전하게 다르다. 거대한 스크린, 빵빵한 음향 시설, 울리지 않는 핸드폰 같은 요소들이 영화에만 완전히 몰입하게 해주니, 강제로라도 눈뜨고 영화를 봐야한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구리게 느껴지는 영화들이 있겠지만 더 좋은 영화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얼마 전 한지민, 남주혁 주연의 영화 <조제>를 극장에서 봤다. 원작 일본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기대하고 있던 작품이었지만, 생각보다 평이 좋지 않길래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극장에 가서 봤다. 영화는 예상처럼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몰입해서 봤던 거 같다. 이 시국에 영화관을 간다는 것이 조금 민폐일 수도 있다. 나는 마스크를 처음부터 끝까지 벗지 않았고 관 안에는 채 10명도 안 되는 관객들이 거리두기를 하고 앉아 있었다. 사실 음식물 섭취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극장이 식당이나 카페보다 코로나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잘 것 없지만 나라는 관객 한 명이라도 영화를 봐준다면 이 영화의 개봉을 위해 힘 썼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금 조금이나마 힘이 될 것 같았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영화관을 찾고, '평이 구린' 영화를 보는 걸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구린 영화 보면 네가 내 돈 물어줄 거야?! 라는 식으로 따지는 사람이랑은 거리를 두고싶을 거 같다) 남의 평이 뭐가 중요하나, 내가 보기에 괜찮았으면 되는 것이다. 남이 남긴 평 한 두마디에 선택을 주저하는 것은 영화 뿐만 아니라 인생, 그리고 삶에 있어서도 그렇게 좋은 행동은 아닌 것 같다. 나도 내년에는 더욱 영화를 열심히 봐야겠다. 특히 극장에서.
2021년에는 극장에서 '천만 영화'를 만나고 싶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이 글이 너무 주관적이라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가 이해해준다면 너무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