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일 바꾸지 말아주세요
[문제] 하기 문장을 보았을 때, 본인의 반응을 고르시오.
1) 아~ 그렇구나.
2) 빨리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3) 그게 나랑 무슨 상관?
4) 뭐라고? 하 XXX... 바꾼다고 대체 뭐가 달라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 주변인 99.8%는 1번~3번을 고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영화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특히나 온라인, 오프라인 등 대행사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에다 개봉일이 변경되는 영화가 본인의 영화라면? 답은 전부 4번으로 통일될 것이다. (혹시 영화 마케팅 대행사 분들 중 4번이 답이 아닌 분들은 댓글을 달아주세요... 어떤 마음이신지 궁금합니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 배급사 입장에서는 개봉 시기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건 우리도 너무나, 절실히! 알고 있다. 누가 봐도 관객수가 보장될만큼 큰 텐트폴 영화나, 장르가 비슷한 경쟁작들을 무시하고 무대뽀로 개봉하는 영화는 세상에 단 한편도 없을 것이다. 최대한 우리 영화가 눈에 띌 수 있는, 사람들이 "이거 보러 가자."라는 그 최적의 시기를 잡기 위해서 연초, 연말, 설날, 추석, 여름방학, 겨울방학 등 각종 시즌 이슈도 고려하며 개봉일을 결정해야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고려하고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개봉일은 또 변경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코로나 사태처럼. 이 바이러스로 인해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 영화 업계가 휘청일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내가 몸담은 회사 또한 코로나 19의 영향을 피해갈 수는 없었고 알음알음 전해들은 동종업계들은 인원을 대폭 감소시키거나 유례 없는 무급휴가 기간을 가지기도 했다. 진작 개봉하고도 남았을 영화들은 회사 서버 내 하나의 [폴더]로만 존재하며 먼지가 쌓여가고 있다. 개봉 전 야근을 불사르며 만들었던 회의 자료는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정말 종사자로써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무를 진행하는 마케터들 입장에서는 '개봉일 변경'에 예민할 수 밖에 없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개봉일 일주일 미뤄진다고 뭐 크게 달라져?"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당연 몰라서 묻는 말이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한숨 + 욕부터 나온다. "네. 달라집니다. 그것도 X나 크게 달라집니다."
'영화 마케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단순히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진행하는 이벤트 정도를 생각하거나, "있어는 보이지만 그게 뭔데?"라고 물을 것이다. ("언니가 영화일을 한다"라고 동생이 말했을 때 동생 친구는 "영화? 엑스트라로 나오시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화 마케팅' 업무는 개봉하는 모든 영화들이 진행하는 필수적인 업무며, 일반적인 대중들에 보이는 모든 영화 포스터라던지 예고편이라든지 배우들의 인터뷰라든지 하는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온라인 영화 마케팅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갑작스럽게 개봉일이 1주일 변경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하기의 업무들을 모조리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진행해야 한다.
1. 네이버, 다음을 포함한 포털사이트 & 멀티플렉스 사이트 & 영화 예매 사이트에서 영화 개봉일 및 개봉일이 삽입되어 있는 예고편, 포스터 등을 전부 교체
(가장 귀찮고 가장 예민한 업무. 빠르게 교체하지 않으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2. 개봉일 기준으로 구성해놓은 영화사 공식 SNS 아이템 및 일정 등 전부 다시 정리
(정리하다보면 미친듯이 화가 난다. 하지만 참아야한다)
3. 예고편 등 선재 최초공개 일정 및 바이럴 일정이 전부 확정된 이후라면, 매체에 연락하여 전부 일정 재조정
(정리하다보면 미친듯이 화가 난다. 하지만 참아야한다2)
4. '돈'이 걸려있는 모든 광고 일정 조정
(위약금을 물어야 할 수도 있고, 우리가 원하는 광고 일정이 없을 수도 있다)
5. 타 매체를 통해서 진행하는 이벤트, 프로모션 일정 전부 변경
(일일이 연락해서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조정해야한다. 우리의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의 잘못인 것처럼 빈다)
6. 유튜브 컨텐츠 등 제작시 크리에이터와 협업하여 일정 조정
(크리에이터가 그 일정은 안 된다고 말 하는 순간 극한의 외줄타기를 하며 일정 조율을 해야하는 거다)
1번부터 5번까지 개봉일 변경이 확정된 이후 하루 이틀 이내 마무리 지어야한다.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더욱 끔찍한 것은 개봉 일정이 한 번 바뀌어서 1~5번의 업무들을 전부 진행해놨는데, 거기서 다시 한번 바꾸는 것이다. 그럼 다시 1~5번의 업무를 진행해야한다. 정말 토 쏠리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일을 하다보면 왠만한 영화들의 개봉 소식이나 일정 등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데, 가끔 보면 개봉일을 몇 번씩이나 바꾸고 미루고 하는 영화들이 있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로 그런 영화들이 더욱 많아졌다.) 그런 영화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장 먼저 대행사 마케터들을 걱정한다. "어떡하냐, 저거 일정 몇 번이나 바꿨겠네. 진짜 X같겠다..." 어깨라도 토닥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위에서 말했듯이 개봉일이라는 것이 영화 마케팅의 종지부이므로 중요한 것은 정말 잘 알고 있지만, 직접 개봉일 변경 관련한 업무를 하다보면 발끝부터 머리까지 스팀이 오를 수 밖에 없다. 마치 '청기백기' 게임처럼 "개봉일 바꿔. 아니 바꾸지마. 아니 다시 바꿔줘." 하는 것을 듣다보면 오버 조금 보태서 정신이 나갈 것 같으니깐요... 굳이 안바꿔도 되는데 왜 바꿀까? 싶은 경우들도 수 없이 많이 봤지만, 나는 일개 대행사 직원이기 때문에 내 의견 같은 것은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다. 어쩌겠나, 그냥 까라면 까는 거다. 우리도 사람이기에 정말 지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봉일을 바꾸는 게 싫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맡은 영화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 누구나 똑같을 것이다. (갑자기 미화시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님...) 다만 나는 철저히 내 입장에서 영화 마케터들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개봉일 변경에 얼마나 빡치고 많은 업무를 해야하는지 말하고 싶었다. (이 글을 우리 회사 윗 분들이 싫어합니다) 앞으로 수많은 영화들이 개봉을 앞두고 있고, 내가 앞으로 몇 편의 영화를 더 담당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개봉일 변경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을 것 같다. 영화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하는 마케터들이지만, 하기 싫은 일도 있는 것이다...
이 글을 누가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업계 종사자가 아닌 분들이 읽으신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혹시 갑작스럽게 개봉일을 바꾸는 영화들을 앞으로 목격하게 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름 모를 대행사 직원들이 갈려 나가고 있겠군... 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