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나는 지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난 일들 속에 있는 '감정'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디에 갔었고, 무엇을 먹었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하지만, 그때 내가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는 도무지 기억에 남질 않는다. 특히나 부정적인 감정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분명히 짜증 나고 화가 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대부분 순식간에 끓어올라 휘발되고 만다. 그래서 내겐 감정의 찌그러기들이 남을 새가 없다. 지난 감정을 붙잡아두지 않는, 아니 그러지 못하는 인간이라 내겐 '후회'라는 일도 참으로 드물다.
후회. 이전의 잘못을 깨우치고 뉘우친다는 뜻이다. 사전적 뜻으로만 보면 굉장히 건조하고 쿨 해 보이지만, 내가 느끼기엔 후회라는 단어는 미련을 품고 있다. 그 속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끈적이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내 인생에서 후회는 없었다.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어떤 미련이 내 발목을 잡았던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생각나는 아쉬운 순간들이 있다.
나는 지난날의 선택에 종종 if를 붙여본다. 내가 그때 A가 아니라 B를 선택했다면 내 인생은 많이 달랐을까? 지금의 나는 다른 모습일까? 그런 상상을 수없이 했지만, 결국 비슷하게 살고 있을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차피 비슷하게 살고 있다면 A가 되었든 B가 되었든 선택은 별 상관없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A라는 선택은 너무나 안전한 길이었다. B도 충분히 괜찮았을 텐데, 나는 지레 겁먹고 한 발 물러났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이 아직도 아쉽다. 한 발 뒤로 물러서던 그 순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뒤로 뻗은 그 한 발자국은 오래도록 나에게 남아있다.
이것은 후회일까. 그래, 어쩌면 후회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전에 생각하던 것들과는 조금은 다른, 미련이 덕지덕지 남은 끈적한 후회가 아니라 건조하고 푸석한 후회. 뒷맛이 쌉쓰름하게 남는 다른 종류의 후회일지도. 나에게 후회는 끈적한 미련이 아니라 푸석한 흉터일 수도 있겠다.
과거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려도 나는 최선을 다했고, 최선의 선택을 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삶을 살았을 거다. 그렇기에 흘러버린 시간도, 스쳐 지나간 인연도 크게 아쉽지 않다. 하지만 지레 겁먹고 한 발 물러났던 순간은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찝찝하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나는 포기하는 일을 포기했다. 닿지 않아도 뻗어볼 것. 이후로 나는 열심히 이리저리 뻗어나갔다. 앞으로도 더 이상의 찝찝한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쌉쓰름한 뒷맛을 남기지 않도록 열심히 뻗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