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읽긴 했으나 직접 사서 읽는 건 많지 않았다. 주로 도서관을 이용했기에 책은 우리 집 책장에 꽂힐 새도 없이 금세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집의 책장엔 항상 무언가 꽂혀있었다. 책 대신 내가 관심을 쏟았던 무언가가. 나에게 책장은 취향의 전시장이었다. 말 그대로 '책을 모아두는 선반'의 역할보다 좋아하는 잡다한 것으로 채워 가는 공간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시작은 명탐정 코난이었고 다음은 원피스였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직접 만화책을 모으기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어릴 때부터 줄곧 동경하던 만화방의 풍경을 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매주 마트에 있는 서점에 들러 원피스나 코난의 신간이 나왔나 확인하는 건 어린 시절 주말의 루틴이었다. 못 보던 새로운 표지가 있으면 냅다 집어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사기 시작한 만화책. 정신을 차려보니 책장에 꽂힌 만화책만 몇 십 권이었다. 똑같은 책등, 살짝 다른 삽화와 숫자. 그 만화책들이 주르륵 책장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괜시리 마음이 풍족해졌다.
다음은 음반이다. 대중음악은 어린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내 삶을 관통하는 가장 큰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좋아하는 가수의 새로운 신보가 마음에 들면 꼭 실물로 앨범을 소장했다. 그렇게 사 온 앨범들은 책장에 하나 둘 꽂혔다. 다비치 1집, FT아일랜드 1집, 에픽하이 4집, 빅뱅 2집 ... 발라드, 힙합, 밴드, 케이팝 가리지 않고 다양한 앨범들이 모였다. 책 대신 높낮이도 두께도 죄다 다른, 저마다의 개성을 한껏 안고 있는 음반들이 만화 다음으로 책장을 차지한 존재였다.
서울로 상경하며 취향을 담은 책장은 잠시 자취를 감췄다. 가뜩이나 좁은 원룸에 생활필수품만 있어도 터져나갈 것 같은데, 책장 같은 걸 둘 여유 따윈 없었다. 작은 책장이 있어봤자 그 자리는 전공책이 대신했다.
다시 책장을 들여온 건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였다. 집이 넓어진 건 아니었다. 자취 경력이 늘어나며 갖은 짐들을 구석구석 숨기는 스킬이 늘어났을 뿐이다. 나는 꾸역꾸역 책장을 놓을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곳에 책, 잡지, 음반, 만화, 작은 소품까지, 내 취향이 담긴 다양한 것들을 채워갔다. 내 눈앞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보이니, 집이 좀 더 집다워졌다.
지금은 책장이 꽉 찼다. 이제는 조금 멀어진, 차마 책장에 다 넣지 못한 지나간 취향들은 신발장 위에 처박혀버렸다. 좋아하는 게 계속 바뀌고 점점 많아지다 보니 어쩔 수가 없다. 이럴 때마다 다짐하게 된다. 먼 훗날, 언젠가 완전한 내 집을 갖게 된다면 벽 한쪽은 전부 책장을 짜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죄다 늘어놓으리라. 지나간 취향도 없애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두며 나의 시간들을 오롯이 감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