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책장을 공유하는 경험
내 친구 중에 가장 책을 많이 읽는 (또 많이 사는) 선누는 친구들과 함께 책장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그 책장에 서로 좋아하는 책을 '입고'해 놓는다. 그러면 내가 샀던 책을 나도 읽고, 너도 읽게 되는 거다. 이 작은 도서관 (우리는 선누도서관이라고 부른다)에 누군가는 문학을, 누군가를 에세이를, 누군가는 인문학 책을 사다 놓는다. 가령 문학이라면,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단편부터 장편까지, 고전부터 현대문학까지, 한국, 일본, 영미 등 전 세계 문학책이 있다.
이렇게 책장을 공유했을 때 가장 좋은 점은, 누구보다 빠르게 취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책들이 있으니 보다가 재미없으면 덮고 다른 책을 펼치면 된다. 이렇게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자연스레 본인의 독서 취향을 알게 된다.
나 또한 선누도서관을 통해 나의 책 취향을 알게 되었다. 취향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인데, 독서량이 별로 많지 않다 보니 '독서 취향'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알게 됐지.
나는 한국 현대 장편 문학을 가장 좋아한다. 취향을 알게 된다는 건 새로운 기쁨이다.
민정의 집에 갔다. 민정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보니 내가 추천해 준 책도 있었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었다.
이 책은 선누도서관에 있던 책이다. 나는 이 책이 너무너무 좋아서, 좋아하는 그 마음이 주체가 안되어서 인스타그램에 추천글을 올리기도 했다. 나의 친구들도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했는데, 내 글을 보고 두 명이나 이 책을 구매했다. 아주 성공적인 영업이었다.
어- 이거 내가 인스타에 추천했던 거네!
응 그거보고 샀지. 아직 다 못 읽었는데 재밌더라.
그치 재밌지. 네가 좋아할 것 같았어.
추천해준 책을 재밌게 읽고 있다니. 아주 뿌듯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소정이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 재밌어?
응 완전. 우리 같은 이과생들이 읽으면 더 재밌어.
오, 그럼 나도 읽어봐야지.
그 책은 선누도서관에서 나에게로, 나의 인스타그램에서 민정에게로, 민정의 책장에서 소정에게로 그렇게 전해졌다.
민정의 집에서 밥을 다 먹고 나니 이내 심심해졌다. 다시 책장에 눈이 들어왔다. 그때 내 눈에 띈 책이 이슬아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이다. 오, 이슬아 책이네- 하고 책을 꺼내 들었다. 수필/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 나라서, 이슬아 작가의 글도 많이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엔 인터뷰집이니 무언가 다르겠지? 심심하니 일단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고 정혜윤의 인터뷰를 지나 김한민의 인터뷰까지 다 읽어버렸다.
와. 엄청난데? 김한민 인터뷰 진짜 좋다.
그치. 그 인터뷰 읽고 나면 뭔가 멍하다니까.
특히 김한민이 '비건'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좋았다. 인터뷰 전부가 '비건'에 대한 내용은 아니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민정도 그렇다고 했다.
맞아. 그 부분이 진짜.. 나한테 미치는 파급력이 너무 큰거야. 근데 도저히 고기를 포기할 순 없을 것 같고. 그래서 내 나름대로 환경을 지키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지.
민정은 늘 생수를 사 먹었는데, 끊임없이 나오는 플라스틱 페트병을 보니 어느 순간 환경파괴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민정은 수돗물을 정수해서 먹는 필터형 정수기를 샀다. 사실 김한민의 글이 감명 깊었던 것도 맞지만, 나는 민정의 행동이 더 깊이 와닿았다. 그 글을 읽고 페트병에 담긴 생수가 아닌, 수돗물을 정수해서 먹는 미니 정수기를 사다니. 멋있는 행동이었다.
나도 이 책을 읽고 변하게 될까? 막연한 생각을 하며 집에 가는 길에 '깨끗한 존경'을 한 권 샀다. 집에 가서 김한민의 인터뷰를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읽어보았다.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좋은 문장은 밑줄을 치며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응집된 에너지가 있는, 오랜만에 읽는 좋은 글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인스타그램에 글을 적었다. 이번 영업도 성공하길 바라면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내 친구들에게 닿았듯, 김한민의 인터뷰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닿길 바라면서.
김한민의 글을 읽기 전부터 환경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곤 했는데, 그 글을 읽고나서부터는 무언가를 소비할 때마다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도사린다. 이 소비는 옳은 일이야? 이 소비로 인해 미세플라스틱이 더 많아지지는 않아? 더 많은 동물이 죽고 있진 않을까? 끊임없이 불편했다.
하지만 나는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인터뷰를 인상적으로 읽었다면, 보통은 저자의 책을 하나쯤 사서 보곤 한다. 근데 나는 그의 글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김한민의 글을 읽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김한민의 책 '아무튼 비건'을 사서 선누도서관에 들여놓았다.
과연 나는 어떤 세계를 마주하게 될까. 내가 아니더라도, 내가 들여놓은 책을 읽고서 누군가 달라질 수 있을까.
우리의 책장은 공유되고, 또 서로 이어지고 있다. 이전까진 몰랐던 '책'의 존재가 유독 크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서로의 책장 한켠을 나누는 일이 이렇게나 재밌을 줄이야. 그렇게 좋은 책을 나누어 읽으며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우리의 세계를 확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