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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은 결혼하지 마' - 이게 웃겨요? 진심으로?

농담이라니. 웃기지도 않네.

by 민진킴

"너는 결혼하지 마. 애는 더 낳지 마."

"왜요?"

"혼자 사는 게 훨씬 나아."


그럼 결혼은 왜 하셨는데요. 싫으면 이혼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지만 그걸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로 사회성이 없는 건 아니라서,


"아, 네."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더 이상의 구구절절한 설명은 듣고 싶지 않으니 제발 입을 다물어 달라는 의미였다. 저런 말을 두세 번 듣다 보면, 차라리 내가 사회성이 아주 결여된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결혼은 왜 하셨는데요? 싫으면 이혼하세요."라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니들은 결혼하지 마.


언제부턴가 이 말은 결혼한 기혼자들의 단골 드립이 되어버렸다. '결혼하지 마라', '이미 했으면 애는 낳지 마라.' 프로필에 떡하니 아이들 사진을 걸어두고 저런 말을 왜 하는 걸까? 저 말이, 수십 명짜리 단체 채팅방에서 적합한 말일까?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들을 보며 얼굴도 모르는 그들의 배우자 및 자녀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하곤 했다.


그냥 흘려듣는 말인데도 불편한데, 그 농담의 대상인 배우자와 자녀들이 들으면 기분이 오죽할까. 저런 말을 내뱉는 건 배우자와 자녀들에 대한 배려도 부족할뿐더러, 그냥 한마디로 멋이 없다. 그냥.. 멋없고 완전 구리다.



결혼이라는 선택이 농담이 된다?


나는 내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물론 돌이켜보면 선택에 아쉬움이 조금씩 남긴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을 단 한 번도 부정한 적은 없다. 어차피 내가 내린 결정이라면 해내는 게 가장 멋있으니까. 후회하는 건 멋없고 부정하는 건 더 멋없다. 그건 진짜 구린 거다.


사람은 인생에서 수 없이 많은 선택을 한다. 그리고 이 세상엔 딱 두 가지 종류의 선택이 있다. 뼛속까지 이과생인 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가역적 선택과 비가역적 선택이다. 가역적이라는 것은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오늘 먹은 치즈케이크가 맛이 없었다면, 비록 내 선택은 실패한 것이지만 다음번 케이크 고르기에선 티라미수라는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있으니 완벽한 실패는 아니다. 하지만 결혼 및 출산은 완벽히 비가역적인 선택이다. 케이크 고르기처럼 다음은 없다. 그래서 그만큼 신중해야 하는 선택인 거다.


내 입장에서 기혼자들이 하는 '결혼하지 마'는 자신의 선택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결혼생활이 쉽지 않아.', '육아는 정말 힘들어.'라고 말했다면 그들의 상황에 공감하고 위로라도 건네주었을 텐데, 괜히 웃기지도 않는 농담으로 포장해서 본인도 배우자도 그리고 그 자녀까지 모두 멋없고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농담은 모두가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결혼하지 마'라는 농담을 들으면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불쌍하다.'이다. 그걸 내뱉는 본인도, 배우자도, 자녀도 다 불쌍하다. 그냥 단순한 장난이고 농담인데 뭘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냐고? 미안한데 저건 단순한 장난도, 농담도 아니다. 농담의 대상을 불쌍하게 만드는 게 과연 농담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혼 드립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종, 소수자, 성별, 장애, 차별 등을 인지하지 못하고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농담으로 지껄이고 있다.


듣는 사람이 불편하면 그건 농담이 아니다. '제발 너는 결혼하지 마.' 같은 농담은 제발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를 당신의 배우자가 들으면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장난으로 내뱉은 말이겠지만 배우자의 마음속엔 보이지 않는 생채기가 생겨났을지 모른다. 제발,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말을 '농담'이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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