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우리 회사에는 부장이라는 직책이 없긴 하지만, 만약 누가 부장님의 농담에 가장 잘 웃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 나라고 대답할 거다. 썰렁한 농담을 들어도 입꼬리를 씰룩대는 내 표정을 보고 사람들은 그런 농담에 웃어 주면 안 된다고 타박을 한다. 솔직히 말하건대, 사회생활이 아니고 진심으로 웃겨서 웃는 거다. 나도 그런 농담에 웃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 안 웃고 싶은데 자꾸 웃게 된다. 아무래도 내 즐거움의 역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낮은 게 분명하다.
내 즐거움의 역치가 낮아진 건 우리 집 가훈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때 내 엄마와 아빠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자’를 우리 집안의 가훈으로 내세웠다. 가훈이라고 거실 벽에 큼직하게 걸려 있던 것도 아니었고 당연히 자주 언급되는 문장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보자면 아마 당시 삼 형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집의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냈을 거고, 삼 형제의 알림장 칸을 비운 채 학교를 보낼 수 없던 엄마와 아빠의 순발력으로 그런 가훈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조금은 가볍고 바보 같고 또 어쩌면 진지한 가훈.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 되자고 말한다고 상황이 긍정적이지 못한데 어떻게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자주 그 가훈을 곱씹어보게 됐다. 회사에 출근하고 나서부터는 더 그랬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보다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자는 생각을 하다 보니 사소한 농담에도 잘 웃는 사람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농담은 기본적으로는 이야기이지만 때로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딱히 재미있지 않은 행동이나 말도 어느 상황인지에 따라 간질간질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농담이 된다. 롤랑 바르트가 쓴 <소소한 사건들>은 롤랑 바르트가 모로코와 파리에서 본 장면들을 찍어 놓듯 써 놓은 책이다. 여기에 쓰인 소소한 사건들은, 전혀 농담은 아니지만 어딘가 농담 같은 부분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문 위, 시멘트에다 목수 아흐메드 미다스는 커다랗고 서툰 글씨로 이 말을 새겨 놓았다. “억지 부엌.” 아버지는 이렇게 본채에 덧대어 낸 부엌을 원치 않았다. 어머니가 원한 것이다.]
좋고 싫다는 감정, 욕망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났는지 쓴 것뿐인데 나는 나무 문과 시멘트에 바락바락 글씨를 쓰고 있을 아흐메드 미다스를 상상하며 즐거워진다. 이런 작은 사건이 일종의 농담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롤랑 바르트의 따뜻한 시선일 거다. 또 누가 하고 누가 듣느냐에 따라 대화가 농담이 되기도 한다. 아빠가 하는 모든 말들이 재미있는 농담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지만, 엄마가 매일 배꼽 잡고 웃으니 그게 농담이 될 수 있는 것 같은 이치다.
최근에는 sns를 떠돌다 장례식장에서 유쾌한 농담을 보았다. 장례식장에서의 농담이 유쾌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관 속에 있는 사람이 생전에 녹음해 놓은 농담에 사람들은 펑펑 울다가도 비죽비죽 웃었다. 그런 농담 뒤에는 늘 따뜻한 애정이 있다. 나는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요, 하는 말의 안쪽 모습이 퐁실퐁실하게 보이는 귀여운 말. 내가 그런 말들을 잘하고 싶기도 하지만, 알아주길 바라는 따뜻한 마음에 잘 웃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