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코로나가 주춤했던 어떤 날에 나는 제주도에 있었다. 2020년 예정되었던 나의 여행들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졌고,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쉽고 또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해서 어디라도 가고픈 마음에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던 제주로 날랐던 것이다.
제주 여행의 마지막 날, 숙소에서 공간을 채우고 있던 향 하나를 서울로 데려왔다. 오래 쓸 것 같지도 않았다. 고작 10ml짜리 작은 통에 담긴 룸 스프레이였다. (10ml는 정말 작다. 소주 한 잔이 50ml 니까.) 그런데 웬걸? 나는 아직도 그 룸 스프레이를 잘 쓰고 있다. 회사 모니터 앞에 세워두고, 사무실이 답답해서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을 때 두어 번 공중에 향을 뿌린다.
머리 위로 뿌린 향이 가라앉아 나에게 닿을 때면 나는 다시 제주도에 있다. 처음으로 오름에 올랐을 때 보았던 나지막한 제주 마을의 모습들이, 붉은 땅 위로 거대하게 솟은 구불구불한 비자나무의 가지들이, 아침 이슬 가득 머금은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빽빽하고 꼿꼿하게 솟은 삼나무들이 내 기억 어디에선가 훌쩍 끌어올려진다.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고 했는데, 그건 조금은 피상적이고 섣부른 판단이었나 싶다. 한 잡지 인터뷰에서 배우 정유미는 여행 첫날 향수를 하나 사서, 여행 내내 사용한다고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그 향수를 맡으면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떠오른다며. 향은 여행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향에는 시각과는 다른 힘이 있다. 한 가지 향을 맡았을 뿐인데, 여러 기억들이 복합적으로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온다. 향은 아마 한 마리의 대어를 잡기 위한 낚싯대라기보다, 여러 마리의 물고기 떼를 잡아 내는 그물망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압축되어 있던 zip 파일을 여는 것 같이 '펑'하며 여러 파편의 기억들을 가져다준다.
후각은 우리가 가진 감각 중 가장 예민한 대신에 쉽게 피로해져, 1분 이상 지속적으로 같은 냄새를 맡을 수 없다. 하지만 1분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 동안 맡은 향은 장기 기억 장치에 저장되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참 신기한 일이다. 저장하기 쉬운 시각적, 청각적 정보보다 저장할 수 없는 향을 우리는 순간적으로 감각해 내고, 더 오래도록 기억해 낸다니. 이에 대한 이름도 있고 연구 또한 존재한다. 프루스트 현상이라 한다.
지난 나의 모든 여행들을 향으로 기억하지 못함이 안타깝다. 여행의 순간들에 향이 없진 않았을 테지만, 그 향을 다시 맡기 전까지 나는 그에 대한 기억을 스스로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다음 여행에서는 주저하지 말고 실컷 좋은 향을 나의 공간으로 데려와야지. 그것은 마치 사진처럼,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