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코니의 여자들> 더는 참지 않기로 한 여자들

by 손민지



현기증 나는 한낮,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남편을 삽으로 내리치며 영화는 시작된다. 40도가 넘는 프랑스 마르세유의 폭염은 정말로 여자를 미치게 만들었나? 폭염이라는 외부 조건이 분노의 기폭제로 작용한다는 점은 오히려 아내가 너무 오랫동안 참기만 했다는 반증 아닐까. 숨이 턱턱 막히고 불쾌지수가 극에 달해야만 이 여자는 겨우 첫 반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너무 오랫동안 참아줬고, 이제 더는 참지 않기로 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소설가 지망생 니콜, 캠 걸 루비, 배우 엘리즈가 발코니 건너편에 사는 남자의 집에 초대받은 후 겪는 충격적인 사건은 마르세유의 폭염과 중첩되면서 세 여자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니콜의 눈앞에 나타난 수많은 남성 유령들은 강간과 폭력을 일삼다 여자들에게 살해당한 가해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 그릇된 믿음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미국의 철학자 케이트 만은 이러한 남성들의 행동을 인셀의 특징으로 정의한다. 인셀은 ‘타인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애정과 존경을 담아 우러러보길 기대하는 남성들이 가진 유해한 특권의식의 결정체’이다. 이 남성 유령들은 자신이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 — 즉 여성의 사랑과 지지, 섹스 — 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폭력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케이트 만은 이를 남성 개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남성의 특권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가부장제의 구조적 문제로 본다.

캠 걸 루비가 맞닥뜨리는 것은 언제나 허용하지 않은 선을 침범하는 남자들의 폭력과 비난이다. 그들은 자유분방하게 신체를 드러내는 루비를 헤픈 여자로 낙인찍고, 헤픈 여자에게는 어떠한 욕망과 폭력을 행사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엘리즈의 남편 폴의 시도 때도 없는 연락은 관심과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은 엘리즈를 통제하려는 것이다. 그는 급기야 마르세유까지 찾아와서는 엘리즈가 원치도 않는 성관계를 요구한다. 이 남자들은 맡겨놓은 듯 당연하게 여성의 애정과 헌신을 요구하다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적대적으로 돌변하고,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이 유해한 남성 특권의 세계 안에서 더 이상 피해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여자들은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그리고 해방은 몸으로부터 시작한다. 배우인 엘리즈의 몸은 성적 대상화되고 통제되는 몸에서 시작해서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객체화되는 몸을 거쳐 임신 중지를 통해 신체 자기 결정권을 가지는 몸, 억눌렸던 고함을 터뜨리는 몸, 신비로울 필요 없는 몸, 쾌락을 느끼는 몸으로 변모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세 여자는 셔츠를 풀어헤치고 가슴을 드러낸 채 밤거리를 걷는다. 각양각색의 몸을 드러낸 마르세유의 여자들도 그 뒤를 따른다. 영화 초반 발코니에서 상의를 탈의한 루비를 훔쳐보던 남자들의 시선은 더위처럼 끈적였지만, 공적 공간을 장악한 여자들의 행진은 은밀한 시선을 무력하게 만든다.


더위? 사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셔츠를 풀어헤치면 그뿐. 이는 더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신체 통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제 숨 막히던 마르세유에도 서늘한 공기가 감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 간단한 것을 왜 우리는 하지 못하고 살까’ 하는 물음에 이르게 된다.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룸 넥스트 도어>여성의 방식으로 전쟁을 다시 전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