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집 보증금 문제로 딸이 본가로 들어오면서 엄마와 딸의 갈등은 시작된다. 문제는 딸이 동성 연인과 함께 들어와 살겠다는 것. 이 모녀의 갈등은 단순한 세대 차이보다는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린은 성소수자이자 비정규직 시간강사로서 끊임없이 불안정한 삶을 감내해 왔고, 자신의 약자성과 소수자성을 인식하며 살아왔다. 그린은 언제나 투쟁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동료의 부당 해고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그것이 언제든 자신의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엄마는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 중심부 가까이에서 구축해 왔다. 엄마는 그 세대에서 드물게 대학까지 졸업해 선생님으로 일했고, 이층 집에 세를 주는 집주인이다.
그러나 엄마는 요양 보호사로 일하며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에 위치하게 되며, 자신과 딸의 삶이 주변부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무연고 치매 노인 제희를 돌보며 홀로 늙어갈 딸 그린의 미래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이는 엄마가 제희에게 애착을 가지게 되는 동기이자, 그린의 시위와 동성연애에 불안을 느끼는 이유다.
그러나 그린과 엄마의 세계가 조금씩 겹치는 것은 엄마가 요양 병원과 극심하게 갈등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돌봄 수혜자의 요청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려는 돌봄 노동 당사자의 노력은 시장 논리와 충돌한다. 기저귀를 거부하는 제희의 존엄을 지키려는 엄마의 돌봄은 ‘비품 낭비’나 ‘형평성 문제’로 번역되고, 감금이나 다름없는 치매 환자 병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막으려는 엄마의 선의는 ‘적자’라는 단어 앞에 가로막힌다. 엄마는 제희의 유일한 보호자이지만 직계 가족이 아니기에 하루아침에 제희가 다른 곳으로 옮겨져도 두고 볼 수밖에 없다.
가족 제도 바깥의 관계에서 느끼는 엄마의 무력감은 그린과 레인 커플이 마주한 무력감과 맞닿아 있다. 제도권 바깥의 관계들은 공적인 장소에서 사적인 장소로 밀려난다. ‘왜 꼭 같이 살아야 하냐’는 그린의 엄마의 물음에,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던 레인의 말처럼, 엄마에게 남은 돌봄의 유일한 방식은 제희를 사적인 장소로 데려오는 것뿐이다. 결국 수소문 끝에 찾은 제희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시작되는 네 여자의 짧은 동거는 <돌봄 선언> (더 케어 컬렉티브, 정소영 역, 니케 북스, 2021) 속 ‘난잡한 돌봄’ 모델을 떠올리게 한다.
<돌봄 선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돌봄의 범위를 한없이 축소시켰다. 이에 저자들은 가족으로 한정되는 돌봄의 범주를 확장하는 ‘난잡한 돌봄’ 모델을 제안한다. 아무런 관계도 없던 네 여자가 동거하는 집은 공적 관계에 진입할 수 없는 사람들의 정치적 투쟁의 장소가 되었다. 그 집에서 돌봄은 증식하고 대물림된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은 어떻게 열리는가. 고독, 질병, 노화는 특정한 이들의 불운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닥칠 미래임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용감하게 연루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