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지구의 복수야.”
“복수가 아니라 방어하는 거지.”
지구는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가? 그리고 여성은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가? <발코니의 여자들>이 던지는 질문에는 자연에 대한 지배와 여성에 대한 지배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에코 페미니즘적 시선이 녹아있다.
지구 생태계는 오랫동안 무한히 착취될 수 있는 자원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지구가 뿜어내는 열기를 ‘방어’로 이해하는 순간, 객체화되고 도구화되었던 자연은 주체의 자리를 되찾는다. 루비는 캠걸이라는 직업과 자유분방한 옷차림 때문에 노골적으로 욕망당하고 착취당한다. 온라인 채팅방 화면 속 구독자들의 욕망을 연기해야 하고, 그냥 가슴일 뿐이라고 외쳐도 발코니 너머 남자들은 루비의 가슴을 노골적으로 구경하며 야릇한 상상에 빠진다. 루비는 카메라와 발코니 너머의 시선 앞에서 줄곧 객체화되고 대상화된다.
이는 별종처럼 보이는 루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엘리즈의 남편은 엘리즈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하려 들고, 거부당하면 엘리즈를 가스라이팅 한다. 가부장제 안에서 기혼이든 미혼이든 모든 여성의 신체는 소유하고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된다.
또한 의료제도 안에서 객체화되는 여성의 몸을 담아낸 장면도 흥미롭다. 산부인과 의사는 엘리즈의 고통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속옷을 벗고 다리를 벌린 채로 진료실에 앉아있는 엘리즈를 방치하는데 이때의 은은한 긴장감과 수치심은 수많은 여성들에게 익숙하다.
감독 노에미 메를랑의 경험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여성의 몸이 겪는 온갖 불쾌함을 보여준 후에, 그 배후에 있는 남성적 시선을 전복시킨다. 엘리즈의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가슴이 비죽 튀어나오지만 가슴은 성적인 코드로 활용되지 않는다. 시체 처리의 급박함, 폭염, 성가신 남편까지 합세하며 엘리즈의 풀어헤친 셔츠는 오히려 그녀의 분노를 더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동안 여성의 가슴이 너무도 당연히 성적인 코드로 활용되어 왔기 때문에 엘리즈의 덤덤한 노출 장면은 새롭기까지 하다. 여기에 마르세유의 여자들까지 각양각색의 몸을 드러낸 채 알몸으로 행진할 때,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이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왜 다른 의미로 재생산되어 왔는지를 묻게 된다.
영화는 남성적 시선이 ‘드러냄’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감추느냐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ㅡ 남자의 추파에 분노하는 여자, 길거리에서 소리 지르는 미친 여자, 가슴과 함께 늘어진 살까지 다 내놓고 다니는 여자, 더 이상 신비롭지 않은 여자…를 통해 남성적 시선을 무력화시키고자 한다. 남성의 판타지에는 없고 ‘진짜’ 여성의 몸에게는 있는 것을 보란 듯이 담아내는 것이다.
줄곧 침묵당했던 엘리즈의 몸은 친구들의 보살핌 아래 임신 중지의 고통을 마음껏 내지르며 신체 자기 결정권을 되찾고, 화분 속에 손을 파묻고 흙을 어루만지며 남편과는 느끼지 못했던 쾌락을 느낀다. 이때 엘리즈는 더 이상 남편에 의해 대상화되는 존재가 아니라 감각의 주체로 자리한다. 더 이상 열기를 내뿜지 않는 촉촉한 흙과 억압당했던 몸이 연결되며 해방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