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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타인의 세계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by 손민지


*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떠올랐던 말들을 썼다가 지운다. 주인이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내 시도는 자꾸만 초라해진다. 이해와 공감이 언제나 선의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을 덮으려 과장된 행동을 하던 청소년기를 떠올리며 주인이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영화는 내 나름의 접근이 옳은 것인지 집요하게 묻는다. 주인이가 말하지 않은 것을 감히 짐작해도 되는가? 공감한다는 것은 얼마나 착각하기 쉬운 감정이며 또한 얼마나 불완전한가?


영화가 의도적으로 감췄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주인이를 특정한 필터를 통해 이해하려는 나는 결국 주인이를 은밀히 단정 짓는 그의 친구들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야 만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주인이의 섬세한 보호자가 된다. 얼마만큼 주인이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주인이를 지켜봐 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주인이의 일관성 없는 말들은 주인이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만, ‘일관성 없음’은 자신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진실과 외부 세계를 조정하려는 주인이의 고군분투다. 주인이의 아픔이 밝혀진 후 영화는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여럿 비춘다.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해 산으로 들어간 사람, 미안함과 민망함에 거리를 두는 단짝, 진짜 너는 뭐냐고 묻는 익명의 친구. 어떤 식으로든 사건은 주인이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꼬리표가 되고 주인이의 모든 행동은 그 사건을 통해 읽힌다.


그러나 주인이의 주체할 수 없는 명랑함이, 남자 친구와의 연애가 매번 얼마 못 가 끝나는 것이, 때로는 텅 빈 태권도장에서 분노를 쏟아내듯 발차기를 반복하는 것이 꼭 주인이의 고통과 연관 지어 설명되어야만 하는가? 주인이의 행동에 ‘진짜’ 주인이와 트라우마와 싸우는 주인이가 몇 퍼센트씩 섞여 있는지 우리는 골라낼 수 있는가?

영화는 주인이의 과거가 아닌 지금을 보라고 말한다. 아빠에게 다가가려는 시도가 매번 미끄러져도, 지난밤 엄마가 남긴 자국을 닦으며 마음 아파도 그 조차 주인이의 몫이다. 어떤 날은 악에 받쳐 소리치고, 누군가를 들이받는 날이 또 오더라도 주인이는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 갈 것이다. 자신의 몫을 감당해 내는 주인이를 제대로 봐줄 때, 피해자가 아닌 그냥 주인이로서 존재할 자리는 생겨난다.

주변의 수많은 주인이들과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주인이의 이야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취하는 것처럼 나는 또다시 공감과 이해의 탈을 쓰고 멋대로 타인을 넘겨짚는 실수를 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이 그러하듯 주인이에게 다가가려는 부단한 시도와 실패 위에 또 다른 목소리들도 터져 나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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