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흑인 중년 여성인 팬지의 깊은 응어리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의료 시스템 속 환자의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
팬지의 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돈되어 있다. 그녀는 강박적으로 문단속을 하며 불안에 떨고, 불안으로 인해 남편과 아들을 통제한다. 팬지의 지나친 분노는 어딜 가든 싸움을 일으킨다. 한편 그녀는 작은 소음에도 화들짝 놀라며, 당장 내일을 계획하기 힘들 정도로 편두통과 근육통에 시달린다.
팬지의 괴팍함은 성격적 결함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쉽게 병리화될 수 있다. 중증도 이상의 우울증, 불안 장애, 편집증, 신체화 증상…. 팬지가 세상을 떠난 엄마를 향한 원망을 터뜨릴 때, 그토록 무심하던 아들의 꽃다발을 받고 눈물을 흘릴 때, 귀 아프게 쏟아내던 팬지의 불평불만의 근원에는 일종의 ‘화병’ 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팬지의 행동을 병리화함으로써 우리는 그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팬지는 쉽게 진단받지 못한다. 몇 주 동안 고대했던 진료는 팬지의 불평불만과 함께 어이없게 끝나버린다. 팬지는 의사의 진료 절차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임 의사는 환자에게 잘했다며 의사를 비난한다. 그다음으로 찾은 치과에서도 진료는 실패하고 만다. 팬지에게는 치아를 확인하는 기본 검진조차 고통스러워 진료를 이어갈 수 없다. 그녀는 통증을 참다못해 ‘환자도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며 분노한다. 이때 관객의 입장에서 팬지는 충분히 진상 환자로 여겨질 만하다. 진료실에서 들어온 이상 환자는 의사의 통제에 따르고 절차에 순응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의 저자 아서 프랭크에 의하면 의학의 권위가 커짐에 따라 환자는 의학에 몸을 양도하게 되며, 이로 인해 환자의 개인적 경험은 빼앗긴다고 했다. 개인의 특수한 고통이 임상적으로 환원되면서 고통이 단일화되고, 환자의 개별 목소리는 묻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팬지를 단순히 진상 환자로만 보게 만들지 않는다. 진료 과정 자체가 환자의 고통을 증폭시킬 때, 의료 과학 지식이 환자의 의견을 당연하게 묵살할 때 환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료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는 팬지의 진료가 실패하는 지점을 통해, 고통이 치유되리라 기대되는 진료실에서조차 환자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들을 드러낸다.
이로써 내 말 좀 들어주길 바라는 팬지의 바람은 가족 내부에서도, 진료실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팬지의 고통은 끝내 병리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화되지 않은 고통을 통해 더욱더 선명히 드러나는 것은 팬지의 다층적 고통과 치유되지 않은 깊은 응어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