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NR(길고양이 개체수 관리) 효과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을, 굉장히 경계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나 같은 개인 활동가에게 TNR이란 단순히 길고양이 중성화 수술을 넘어 돌봄 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당연한 주장도 불특정 다수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길 위에서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그러므로 궁지에 몰릴 때마다 내가 꺼내는 패는 국가와 과학의 권위를 동원하는 일이었다. 저자가 썼듯이 국가에서 시행하는 길고양이 중성화 사업은 ‘법적 행위’이다. 여기 애들은 구청에서 중성화 수술을 받은 애들이라고, 이제 더 이상 새끼도 낳지 않고 소음도 줄었다고, 그러니 이 구역에서 잘 살아가도록 관리해야 일정 개체수가 유지된다고 설득하고 때로는 부탁해 왔다. 만약 TNR의 불확실성을 파헤친다면 혹여나 우리의 위태로운 설자리마저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저자는 문제의 초점을 틀어버림으로써 익숙한 길을 허물고 TNR을 아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단순히 말해 길고양이는 과학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통계의 이름 안에 가둬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중성화를 했다 한들 길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고양이는 절대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개체수 파악은 계산법에 따라서 크게 달라지는데, 여기에는 물리적인 환경과 고양이의 행위성이 관여한다. 길고양이는 변화하는 물리적 환경 속에서, 생동하는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그러니까 과학이 고양이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서 주체적 행위자로서의 고양이를 보자는 것이다. 이때 주체적 행위자인 길고양이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협상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생명은 언제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소중한 생명이지만, 인간보다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생명체는 없다.(p.130)
지난 5년간 꾸준히 TNR 사업에 참여하는 동안 내가 돌보는 고양이 군집의 개체수는 절반 이상 줄었지만, 내 경험과는 별개로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통찰은 개체수 조절이란 얼마나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결국 ‘정말로 고양이 수 자체가 문제인가?’라는 저자의 질문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을 이어나간다. 적절한 개체수라는 말의 이상함에 대해서, 행정의 이름으로 비인간 생명에게 가해지는 손쉬운 폭력에 대해서, 개체수가 지우는 개별 개체의 삶에 대해서… 그렇다면 나는 이제 실전에서 어떤 논리를 차용해야 할까? 정말로 길고양이를 정치적 주체라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오가야 할까?
한편 캣맘/캣대디와 활동가가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점에서, 나는 돌봄 당사자로서 그 구분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활동가들은 스스로를 캣맘/캣대디 정체성과 구분하고, 저자 또한 그 구분의 필요성을 언급하는데 이때 구분의 기준은 ‘공생 문화’ 실천이다. 저자가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맥락을 모두 알기는 어렵지만, 공생 문화 실천과 캣맘/캣대디 활동은 정확히 구분될 수 있을까? 혹은 ‘공생 문화’ 실천이라는 구분이, 말의 의미와는 달리 두 집단 사이의 거리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먹이 제공을 기반으로 한 길고양이 돌봄은 불가피하게 타인의 불편 혹은 반대와 마주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고 협상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공생 문화 실천과 돌봄 활동은 정확히 분리하기가 어렵다. 인터뷰에 참여한 활동가들 또한 고양이 분변 청소뿐만 아니라 다친 고양이 구조와 치료에 앞장서며 이미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을 한다. 누군가와 공존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돌봄을 요하는 일이고, 돌봄 노동 자체가 타자와 공존하려는 시도 위에 있다.
또한 자칫 이런 구분이 의도와는 무관하게 기존의 캣맘이라는 호칭에 붙은 혐오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여지는 없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길고양이는 비대칭적인 관계에 놓여있고, 이미 도시 환경은 충분히 인간 중심적이다. 이때 길고양이들은 캣맘/캣대디의 기본적인 먹이 제공 없이는 공존은커녕 생존도 힘들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자세히 다뤄지지 않은 부분이라 내막을 알 수는 없고, 또한 묘호 구역 활동 자체가 도시재생센터의 지원금을 받는다는 점에서 활동의 제약이 있었으리라 예상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학습되고 공유되며 형성되는 것이 문화라면, 이런 구분이 의미가 있을까. 때로는 돌보는 이들 사이의 끈질긴 상호작용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양이는 모든 것이 인간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는 교리를 깨뜨리러 이 세상에 왔다.(p.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