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물에 대한 단상앨리스와 엘리스
‘이웃집 사는 앨리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스모키의 노래다.
1976년 이 노래를 불렀으니 옛날 옛적 노래다.
고등학생 오빠들이 통기타를 들고 장독대에 둘러앉아 날마다 부르던 노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버된 감정을 허스키와 쇳소리를 구별하지 못한 채, 스모키인 척했다.
‘왜들 저러나?’ 했었다.
세월이 흐른 후, 스모키의 원곡을 노래 가사와 함께 들었을 때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보들, 이 노래를 그렇게 했다고?’
아마도 오빠들이 흉내 내고 싶었던 것은 24년 동안 옆집에 살면서 사랑 고백할 기회를 엿봤던 노래 속 화자 ‘나’의 쓸쓸하고 서글픈 감정이었을 터.
어린 시절 함께 지낸 추억에서 시작해서, 이사 가는 날까지 이사 간다는 사실 조차 모른 채
소외되었던 ‘나’의 짠함.
그들이 한 번쯤 경험했을 짝사랑과 어우러져 그토록 오버해서 앨리스를 불렀으리라.
누구나 이웃집에 앨리스 하나씩은 있었을 테니.
그들도 스모키처럼 가슴속 앨리스가 있었는데, 그런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쳤던 앨리스가 가련한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리무진에 올라 ‘나’의 눈앞에서 사라져 갔으니,
온몸을 비틀며 가슴을 쥐어 짤 수밖에.
24년이나 기회를 엿봤건만 고백하지 못한 ‘나’가 이미 떠나간 앨리스가 없는 그 집에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거라고 쓸쓸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목소리로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외로움과 쓸쓸한 감정이 좋은 걸까.
24년 동안 간직한 순정이 좋은 걸까.
앞으로도 못 잊겠다는 영원한 사랑이 좋은 걸까.
어쩌면 모두 다 일수도 있겠다.
추억은 그리 쉽게 버려지지 않으니.
아프더라도 간직하고 싶은가 보다.
아프더라도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인생이 되는 거다.
이웃집 사는 앨리스에게 고백하려거든 이사 가기 전에 해야 한다.
아니 그전에 고백을 받아줄지를 먼저 판단해야겠지만, 짝사랑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부딪혀봐야 알일.
선선해진 아침나절,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맞나 ‘앨리스’가 맞나?
이상한 나라에 간 앨리스는 엘리스이기도 한 것을 확인하던 와중에
‘이웃집 사는 앨리스’를 발견했다. 오랜만에 들어본다. 이웃집 사는 앨리스.
24년 동안 기회만 엿보다 고백도 못했는데, 이사 간 앨리스.
엘리스가 아닌 앨리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