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침놀 Nov 01. 2021

비트겐슈타인의 말

<비트겐슈타인의 말>, 비트겐슈타인, 인벤션, 2015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선물 받았다.

침대 맡에 놓고, 며칠이 지나고 나서 펼쳐봤다.

비트겐슈타인, 이름조차 철학적으로 보인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고, 유복했단다. 아버지가 철강 재벌로 사회적 힘과 막대한 부는 당시의 왕실과 귀족계급을 압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별도의 가정교사는 물론이고 아버지가 소장했던 장서가 많아 학문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물질적 풍요는 물론이고, 저택을 방문한 예술가들의 영향으로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형제자매들과 아버지와의 다른 성향으로 인해 갈등이 심했고 이로 인해 위로 세 명의 형이 자살을 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는 언어철학자로 알려져 있고,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논리철학 논고>라는 불후의 저작을 완성하고 모든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철학적 문제와 싸우기 위해 노르웨이의 바닷가에서 오두막을 짓고 혼자 지냈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포로 생활도 했다. 석방되어 돌아온 후에 그는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을 가난한 문인들을 위한 기금으로, 형제자매에게 모두 나누어준 후 극도로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란 제목으로 정리된 그의 말을 매일 조금씩 들어보았다.

그의 말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처럼 생각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깊고 차분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누구도 자신처럼 생각해주지 않는다. 제 머리에 모자를 얹을 수 있는 게 자신뿐이듯, 생각하는 것도 언제나 자신이 해야만 한다.  -문화의 가치-


그렇다. 어느 누구도 자신처럼 생각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불현듯 궁금해졌다.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도 나 자신처럼 생각해줄 리가 없건만, 정작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에 관한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남의 생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누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의심 없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탓을 하자면  구글씨 때문이겠고, 네이버 씨도 거들었고, 친절한  유튜버들의 그룹도 그랬다. 이들의 공통점은 쉽고, 알아서 내 생각의 방향을 정해주며, 나를 모두 ‘사용자’라 부른다.

사용자님이 오늘 필요한 지식은 물론이고 취향에 맞는 것도 권해준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들의 생각을 이리저리 굴린다. 클릭, 클릭을 반복하면서 그들을 사용한다. 사실 나는 생각을 사용하는 사용자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이 설정해놓은 구조대로 생각하는 사용자 계급으로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로 설정된다. 내가 원하는 것만 보게 해 준다. 다른 생각 따위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껏 나를 읽게 하고 내 생각을 엿보이고, 내 삶의 조각들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건만,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인가, 생각을 사용하는 사람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 머리 위에 내 손으로 모자를 올려놓기로 했다.      

                                                                            

생각이란 영상으로 그리는 것

생각이란 스스로 어떤 영상을 그리는 것이다.  어떤 것이 자신의 눈앞에 또렷이 그려지는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결국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철학의 문법-


생각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생각은 영상이다.

스스로 어떤 영상을 그리는 것이다.

머릿속에 영상이 떠오른다면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영상이 떠오르는가?

그렇게 생각이 발생한다.

영상은 기분 좋은 영상일 때도 있고, 기분 나쁜 영상일 수도 있겠지만, 눈앞에 또렷이 그려진다면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연인을 떠올리는 배우들과, 상처 받은 순간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마음 아픈 장면에서 눈물을 찔금거리며 함께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란 그렇게 영상으로 남는다. 데이터를 보관하듯 추억의 영상들이 보관되어 있다가 떠오른다. 눈앞에 또렷하게. 그렇게 우리는 생각이 발생하는 순간을 함께 한다.   

                                                                              

하찮은 생각에 휘둘리고 있지 않은가?
바람이 불어와 나무를 마구 흔든다. 바람은 거대한 나무를 마구 흔든다.

우리도 나무와 같다. 아무래도 좋은 생각에, 하찮은 생각에, 별 볼일 없는 생각에 마음이 마구 흔들린다. -문화와 가치-


흔들린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야 한다.

거대한 나무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찮은 생각에 흔들리는 것은 맞다.

별 볼일 없는 생각에 몹시 흔들릴 때가 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흔들리고 흔들린다.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를 보지 않는 것에서부터, 반점인지 온점인지, 말줄임표를 했다면 줄여진 의미가 뭔지 궁금해질 때도 있다. 전화 통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미세한 목소리의 변화에도 뭔가 있나, 생각한다.

그렇게 매일매일 흔들린다.

생각하면 마음이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으면 나무가 아니다.

매일의 흔들림은 새롭게 발생한다.

오늘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흔들리고 있다.                               

                                                          

~라면, ~이었다면 이런 생각에서 비극은 시작된다….

이미 벌어진 사태에 대해 ‘만일~이었다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라거나 ‘이러했다면 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무 많은 것이 고통으로, 불운이나 비극으로 바뀌어버린다. -철학 종교 일기-


    

“만약에 ~라면”은 긍정과 부정의 가능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만약에만일의 결론은 이랬더라면으로 갈 수밖에 없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만약에'나 '만일‘은 비극적인 말이 되겠다.

그러나 인간은 이토록 필요도 없는 말들을 하면서 불운이나 비극을 이겨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후회와 반성의 길목에서 깨닫게 되는 만약에 ~라면이 비록 가슴을 쥐어뜯고, 머리를 감싸 안아 무릎을 눈물로 적시더라도…. 그러면서 고통에서 빠져나오기도 한다.                          

                                                           

비유가 사고방식을 구속한다

우리는 흔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사물에 빗대어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시간이 그렇다. 우리는 시간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흘러간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가버린다, 시간을 써버 린다, 시간이 아깝다…. 이 같은 말은 보통 강물이나 바람 음식 같은 사물에 대해 하는 말이다. 그것을 간단히 시간에 적용시켜 시간이 그런 물질과 비슷한 성질을 지녔다는 관념을 갖게 만든다. 그렇게 비유적으로 생각하면 시간은 어느새 일종의 사물이 되어버린다. 그 자세로 변화를 시간으로 보는 다른 사고방식은 가질 수 없다. 한 가지 사고방식만 가진다면, 그 사고방식에 따른 인생밖에 살아갈 수 없다. -철학-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가버리지도 않고, 쓸 수도 없다. 소유할 수 없으니 아깝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없다. 시간을 다른 무엇에 비유하지 말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게 비유하면 시간이 흐르는 사물과 비슷한 성질을 지녔다는 관념을 갖게 되고, 다른 사고방식은 가질 수 없다는 얘기다.

단 한 번의 의심 없이 습관적으로 썼던 말이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고 있어.”

시간은 그렇게 오랫동안 내 곁에서 흐르고 있었다. 시간은 인간이 창조한 개념이다,

하루나 한 해, 계절의 흐름을 계측하는 단위가 필요했고, 하루의 흐름을 해시계, 계절의 흐름은 스톤헨지 등의 도구를 이용해 측정했다. 분 단위의 시간을 측정할 때는 모래시계를 이용했고 진자와 톱니바퀴와 태엽들로 시간의 흐름을 정밀하게 측정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여전히 오랜 세월 흐르고 있었다.

시간은 무엇일까?     


아, 이래서 철학은 어려운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에세이-네 개의 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