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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놀 Oct 28. 202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에세이-네 개의 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민음사, 1999





묵직함과 가벼움

니체. 소설의 시작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성찰로 시작한다. 인생의 덧없음과 역사의 망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무한 횟수로 반복된다면, 영원회귀의 세상에서는 각각의 몸짓이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게 될 것이고 가장 무거운 짐이라 말한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묵직함과 가벼움 중에.

이 소설의 서술자는 토마스를 생각했다고 한다. 그를 떠올린 이미지는 안마당 건너편 건물 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아파트 창가에 서 있던 그, 망연자실한 표정의 그였다.     


카르페 디엠, 토마스의 방

그는 3주 전쯤,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에서 테레사를 만났다. 그들은 1시간 남짓 함께 있었고, 열흘 후 그녀는 그를 만나러 프라하에 왔다. 그들은 그날 함께 잤다. 그녀는 몸이 펄펄 끓었고, 그의 집에서 일주일 내내 독감에 시달렸다. 테레사로 말할 것 같으면 토마스의 집에서 처음으로 밤을 지낸 여자다. 토마스는 그의 침대에 어떤 여자도 재우지 않는다. 여자를 재우지 않기 위해 소파조차 두지 않았던 그다. 토마스의 딜레마다.

그에게 강렬했던 테레사의 이미지는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서 꺼내 그의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은 아기였다. 그는 그 아기를 놓고 함께 사는 것과 혼자 사는 것 중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에 빠졌다. 인생이란 그림자와 같고 아무런 무게도 없으며 새털보다 더 가벼운 것을….

그 무엇을 선택한단 말인가.     


토마스는 선택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며 삶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되뇐다. 그의 딜레마는 자기 자신의 결정들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할 길은 없다는 점이다. 삶을 구성하는 사건들은 오직 한 번 밖에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는 알 수 없는 미래의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 무거움 짐을 벗어버리는 삶을 택했다. 가벼움이 토마스의 테마다. 그는 바람둥이다. 한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가벼움을 획득했다,      

이렇듯 “카르페 디 엠”에 충실한 토마스에겐 어떤 여자와도 에로틱한 우정 이상의 관계는 거부한다. 삶에 극도의 가벼움을 일관되게 추구하던 그가 테레사를 알게 된 후에는 '그래야만 한다'라는 무거운 숙명에 짓눌리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모세 신화와 오이디푸스 신화의 이미지를 투과하여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운명이란 필연적 무거움이다.    

  

섹스는 하되 함께 잠들지 않는다던 그가 테레사라는 무거움의 운명을 받아들여 그녀와 손을 꼭 잡고 잠이 들며, 잠을 자는 내내 손을 놓지 않으려는 그녀에게 기꺼이 손을 내 주지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다른 정부에게 달려간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테레사에 손에 이끌려 프라하에서 취리히로, 다시 프라하로 그리고 시골로 이동한다. 그들은 소련의 침공을 피해 취리히로 갔다가 토마스의 바람기와 짐이 되기 싫다고 생각했던 테레사가 프라하로 돌아오자 그는 테레사를 찾아 프라하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이것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재난이라고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배한 것을  '그래야만 한다'였다. 프라하로 돌아온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오래전에 기고했던 오이디푸스의 눈에 비유한 공산주의에 대한 글이었다. 당국이 요구하는 자아비판에 응하지 않은 그는 유리창닦이로 생활한다. 그에겐 많은 여자들과 즐길 수 있는 휴가기간이었지만, 테레사에겐 고통의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결국 시골로 떠난다. 시골에서 농산물을 운반하는 일을 맡아하던 토마스. 트럭의 브레이크 고장으로 결국은 테레사와 함께 생을 마감한다.      


수줍어할 권리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테레사의 방

테레사는 어머니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수치심의 방에 가두었다. 어머니의 운명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실패한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테레사는 죄인이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만들어 씌워놓은 죄책감에 허우적대며 속죄를 위해 살았다. 그녀에겐 부끄러움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열다섯 살부터 웨이트리스로 일해 번 돈을 어머니게 바치고, 살림도 도맡았고, 동생들도 보살폈으며 일요일에도 집안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신분 상승을 원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저속한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은 바로 책이었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책을 놓지 않는다. 어머니의 집에서 탈출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방법이 없던 차에 기회가 왔다.    

 

한 남자가 그녀가 일하는 술집에 들어왔고, 그는 그 지역의 남자들과 달랐다. 때마침 베토벤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그녀는 그가 온 지 알지 못했다. 그를 발견하는 순간 그는 “코냑 한 잔”이라고 말했다. 코냑을 들고 가까이 갔을 때 그가 책을 읽고 있음을 알았다. 낯선 남자에게 은밀한 동지애를 느낄 즈음, 그가 술값을 호텔 숙박비에 포함시켜 달라고 말했다. 테레사는 몇 호실에 머무냐고 물었다. 그의 손 끝에 숫자 6이 딸랑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상한 일이군요. 6호실에 계시고, 전 6시에 근무가 끝나고,” 이어진 토마스의 답변, “나는 7시에 기차를 타지요.” 이렇게 우연의 새들은 그녀의 어깨 위에 모여들었다. 그녀는 이 낯선 남자가 그녀의 미래의 운명임을 알아챈 것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그녀가 그랬다. 그녀를 죄인으로 만든 어머니로부터 탈출할 우연의 순간이 온 것이다. 어머니가 만든 감방에서 탈출한다.  

    

토마스의 방에서 동거를 시작한 테레사의 낮은 삶에 몰두하며 생명력을 회복하고 신뢰감을 얻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책으로 독학한 것이 내면에 비축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녀의 밤은 행복과 불행을 넘나들었다. 토마스의 방에서 유일하게 잠이 든 여자였지만 토마스의 바람기는 잠들지 않았다. 그녀의 질투심은 죽기 전까지 지속되었으며 늘 꿈으로 연장되어 나타났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모든 여자에게 키스했고 같은 식으로 애무했으며 테레사의 육체와 어떤 구별도 하지 않았는데 그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어머니가 만든 세계로 되돌려 보내진 셈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라. “네 몸도 다른 사람의 몸과 다를 바 없으니 너에겐 수줍어할 권리가 없다.” 수많은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감출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녀 어머니의 말이다. 그것은 획일성을 강요하는 모욕이었다.


테레사는 질투에 빠졌다. 반복적이고 연속되는 악몽으로 괴로워했다. 테레사의 꿈속에서 토마스는 잔인한 정복자였고 그녀는 노예였다. 공포에 전율하며 깨어난 그녀는 자신의 무능력과 나약함에 진저리를 쳤다. 테레사는 나약함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나약함은 현실에선 오히려 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토마스에게 말이다. 토마스는 이제껏 자신의 삶을 지배해온 불문율을 깨고 그녀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테레사가 자는 내내 토마스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듯, 현실 속에서 그녀는 토마스의 삶을 장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약성을 무기로 토마스를 괴롭히고 정복하며, 삶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공격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결국은 죽기 전에 그 사실을 알게 된다. 토마스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자신이었음을.      


중절모가 있는 사비나의 방

멜랑콜리. 사비나의 이미지다. 그녀는 에로틱한 독신주의자 토마스의 개인주의와 바람기 능가한다. 그녀는 토마스를 가장 잘 이해한다. 유능한 화가로 회화 작업 중 터득한 '이중 표현'기법을 그녀의 이상에 응용하여 실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은 이해할 수 있는 거짓말이고 뒤는 알 수 없는 진실이다.”

토마스와 테레사 커플과 마찬가지로 사비나와 프란츠 대칭적 모순 성향을 가졌다. 사비나는 에로틱한 자극에 휩쓸린다. 반면 프란츠는 순수하고, 순정적 사랑을 중시한다. 여기서 사비나의 중요한 모티브가 있는데 바로 중절모다. 아버지의 유산 대신 선택한 유물이고 실존의 표현이다. 그녀에게 중절모란 독창성을 상징하고 시간의 회복과 함께 추억을 상징한다. 중절모는 그녀의 중요 모티브다,  

“중절모는 사비나의 삶을 형성한 악보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 모티브는 계속 영원히 되풀이되었으며 매번 다른 의미를 띠었다. 이 모든 의미는 마치 물이 강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듯 중절모를 거쳤다.”    

 

그녀는 ‘배반’을 아름다움으로 규정한다. 아버지가 강요하는 순수의 세계에 반항하다가 아버지 자체를 배신하는 것에 매료되고, 국가에 대한 배신에도 매혹된다, 그녀는 강박적으로 배반하는데 몰입한다. 그녀에게 배반이 아름다운 이유는 일렬 행진의 대열에서 벗어나는 행위, 결과와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녀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

그녀가 혐오하는 극단, 극단의 공산주의 체제와 혁명,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만드는 빛과 어둠. 극단은 삶을 소멸시킨다. 그 세계는 그녀에게 군중 속에 사는 거짓된 삶이며 그녀는 그 삶을 혐오한다.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그녀는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게 되면 우리가 하는 것의 그 무엇도 진실이 아니게 된다.”

그녀는 서정적 감상주의와 키치를 혐오하여 강박적으로 배반의 태도를 일관했다. 그녀의 드라마는 가벼움이다. “짓눌렸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우울증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도착한 편지, 토마스와 테레사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였다. 그녀는 테레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토마스의 소식에서 겉으로는 돈 주앙이었으나 본질적으로는 트리스탄의 기질이 숨어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쾌락처럼 가벼움에 이끌려 배반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그녀가 전원에서 슬픔과 평화로움 속에서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중절모의 모티브가 배경이 된 사비나의 방이었다.     


헤라클레스의 빗자루를 든 프란츠의 방

프란츠 나약하고 서정적 인물이다. 이성을 대할 때 프란츠 역시 테레사처럼 죄의식에 의해 정조를 제일의 가치로 삼는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 때문에 가슴 아파했던 그는 여자에게 충실한 것을 사랑으로 여기고 정조를 미덕으로 여긴다.


“프란츠는 강하다. 그러나 그의 힘은 오직 외부로만 향하고 있다,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는 약하다. 프란츠의 허약성은 선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학문이 지닌 허영심과 대량의 문서에 대한 회의와 권태를 느끼고, 좌파진영의 혁명성에 매력을 느낀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심리적 욕구 표현이다. 그의 좌익성향은 음악과 춤에 대한 도취, 행진, 구호에 대한 희구 몽상가적 기질 및 심미안을 통해 알 수 있다.


헤라클레스의 빗자루, 그의 학문에 대한 공허감 가족에 대한 회의와 자기 파괴적 성향을 드러내는 도구다. 신화에서 차용한 헤라클레스의 빗자루는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에게 공허한 것은 학문과 예술, 가족이었다. 그가 진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공적 삶과 사적 삶의 경계가 없는 것을 뜻한다. 은밀한 비밀도 없이 모든 시선에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비나를 사랑하는 프란츠는 그녀와 결혼을 함으로써 이 사랑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외부에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포옹 이후 사라진 사비나. 사비나는 이제 그에게 종교와도 같은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에게 여신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가 캄보디아 국경까지 가서 죽음을 맞이한 이유다. 버스가 태국의 도로에서 덜컹거릴 때 그는 그녀의 시선이 오랫동안 그에게 고정되었다고 느낀다. 헤라클레스의 빗자루를 든 프란츠의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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