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옷 사고 싶은 봄날의 일기

그래서 삶은 내가 아니야.

by 미오

즐겁고 신이 날 때의 나도 화내고 짜증 낼 때의 나도 아내이자 딸이며 누나이고 사장님이고 백수이자 작가 지망생인 나. 제주도에 살고 있는 나. 모두 나라는 사람. 나이다.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거기에 나는 없는듯하다. 오로지 미래에 되고 싶은 어떠한 나만 있었을 뿐.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하기에 책을 읽으며 성공한 내가 되기를 바랐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헤세의 작품조차도 그와 같이 멋진 작품을 쓸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러 번 읽었다. 명상을 배우러 갔을 때도 성당에 나갔을 때도 나의 불편한 마음과 화나는 마음을 들여다보기보다 그저 명상과 종교에 기대어 어서 평화로운 마음의 나를 만났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지금까지 내가 애쓰던 일들에는 내가 없었다.


마흔 살을 바로 코앞에 두고 보니 그동안 해왔던 모든 일들을 완성하지 못하고 중도에 하차했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그렇게 하면 멋지고 돈 많고 우아하고 예쁜 집에 사는 내가 되어 있을 줄 알았지만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 내 마음처럼 되는 일이라곤 정말 하나도 없더라.

그동안 이렇게 살아온 내 인생이 참 비참하고 우울해졌다.


그럼에도 요즘에 나는 집에서 낮잠까지 꼬박 챙겨잔다. 배가 고파지면 라면을 끓이거나 계란 프라이에 대충 한 끼 그냥 때우고 마는 정도로 게으르게 빈둥거린다. 몸이 좀 찌뿌둥 하다 싶으면 산책이나 나가볼까 하고 그마저도 내키지 않으면 집에만 있는다.

남편과 함께 차린 와인 파는 음식점에는 사장이라는 명함만 걸어놓고 나의 몸과 마음은 집에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이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은 것일까? 누군가는 매일 조금씩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성공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는데 나는 정말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제주도에 내려온 지 2년 만에 2억 가까운 돈을 까먹었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건축이 확정된 작은 아파트도 내놓았다. 일이 이지경이 된 마당에 책 보고 글 좀 써보겠다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매달 돌아오는 카드 결제 일에는 불안함과 짜증과 화가 밀려와 주체할 수 없으면서도 도대체 왜 나는 이러고 있을까?


아까 낮에는 벼르던 남편 방 옷장을 정리했다. 옷을 다 끄집어 내서 버릴 옷과 빨 옷들을 정리하는데 그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옷이 멀쩡한 게 하나도 없었다. 여기저기 기름이 튀고 헤지고 늘어나고 얼룩이 묻고 세탁해서 건조기를 돌렸는데도 습한 냄새가 남아있었다. 옷을 사주면 매번 살쪄서 못 입게 되거나 옷을 험하게 입어서 금방 헌 옷이 돼버리니 '아~ 뭐 하러 좋은 옷 사주는지 모르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나도 옷 사고 싶은데 또 남편 옷만 사겠구나.' 하는 생각에 화가 가시지를 않았다.

정말이지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될까? 당장 눈앞에 빚이 얼마인데 새 옷 타령이나 하고 말이다.


잠깐 가게 브레이크 타임에 집에 온 남편이 화를 내면서 자기 옷 정리하는 나를 보더니 "내 옷은 왜? 이 사람이 나를 쫓아내려고 그러나?" 이러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바보 같은 놈! 쫓아내긴 왜 쫓아내! 딱 하나 나한테 남아있는 게 너인데!'

'내가 아무리 지랄 떨어도 행여나 어디로 도망갈 생각 말아라.'

라고 내뱉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만만한 남편뿐이었다.


옷장 정리를 다 마치고 선물 받은 [도시인의 월든]을 읽었다.


인생의 어떤 것은 모순이고, 어떤 것은 실패이고, 어떤 것은 성공인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삶이다. 남들이 평가하는 것과 삶은 별로 상관이 없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남들이 평가하는 것과 삶은 별로 상관이 없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깨어 있는 한 우리는 자꾸만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세상에는 탁월하고 본받을 만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격이 있어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 삶 역시 유능 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불완전하고 모호한 그 상태 그대로 살아남을 공간이 있다. 염소에 집착하는 아저씨가 살아남았고, 마땅한 직장이나 직업이랄 만한 것도 없이 8년째 낮잠이나 챙기는 내가 살아남았듯 말이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본다면 서른아홉 나는 성공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프롤로그에 쓰여있는 저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위안이 되었다.


'그래. 모든 것이 그냥 삶이야. 그리고 삶은 내가 아니야. 왜인 줄 알아? 삶이 나라면 실패도 성공도 모순도 다 난대. 그것들이 내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함께 하지 않거든. 성공이든 실패든 모순이든 내가 죽더라도 그 결과물이 어딘가에 남아 있거나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변해가거든. 그래서 삶은 내가 아니야. 그냥 잠시 내가 겪고 경험하는 상태일 뿐이지.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실패를 포함해서 과거에 겪었던 실패 역시 내가 아니야. 그것들은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거든. 그 덕분에 지금 겪고 있는 실패가 제일 아리고 아프지.'


지금 충분히 실패를 겪느라 힘들다고 징징거리면서도 나는 또 실패할지도 모를 무언가를 시작해서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줄지 새로운 일은 성공할지 모르지만 그냥 또 한다. 말로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낮잠이나 자고 싶다고 하면서도 남편의 옷장을 정리하고 집 안을 사부작사부작 정리해 당근 마켓에 물건을 내다가 팔고 블로그에 제주도 맛집 포스팅을 올리고 인스타그램에 온라인 북클럽을 오픈한다고 공지도 올려놨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이상하지만. 뭐 어떤가. 이또한 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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