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의 계보
임미옥
모든 꽃은 해당화에서 시작되었다.
바닷가 모래톱,
하늘에서 밀려난 듯
낮은 자리에서 붉게 울던 꽃.
그 잔빛이
작은 화단의 우주로 번져
나를 키웠으나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그 우주는 순식간 무너져내렸다.
그 뒤로 해당화는
다른 꽃들의 얼굴을 건너왔다.
숨을 깊게 몰아쉬던 모란,
빛을 향해 뻗어오르는 장미,
불꽃처럼 번지는 다알리아—
그러나 어느 꽃도
그 첫 이름을 대신하지 못했다.
그러던 날,
꿈의 화단에서
낮고 깊은 한 꽃이
분홍과 붉은 빛을 섞어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 꽃의 이름,
해일리아.
해당화의 낮음과
모란의 숨,
장미의 결,
다알리아의 기품을 품은 채
지면에서 조금 떠서
수평으로 뻗어가며
수직의 빛을 동시에 건너는 꽃.
나는 그제야 알았다.
모든 꽃은, 끝내 첫 자리로 돌아가며
자기의 높이와 깊이를 얻는다는 것을.
이제 나는,
오래된 화단의 첫 빛을 따라
나만의 길로 번져갈
나의 꽃을 그리려 한다.
아직 세상에 없는 해일리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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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노트 — 「해당화의 계보」를 쓰며
해당화는 바다의 꽃이다.
섬마을 아가씨였던 엄마가 육지로 와 처음 꾸린 작은 화단에서 피운 꽃들도 대부분 해당화처럼 작고 낮았다.
그 작고 낮음은 내가 오래도록 숨기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변소 옆 손바닥만 한 화단—
나는 그곳을 우주라 여겼으나 “고작 이것이냐”는 말 한마디에 그 세계는 한순간 모욕당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작음과 낮음에 대한 열등과,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더 크고 높아 보이는 세계를 찾아 떠돌던 시간이 내 삶의 결이 된 것은.
그 길은 문학창작과 문학치료, 가톨릭상담심리학과 영성의 여러 방으로 이어졌다.
그곳에서 나는 오랫동안 엄마의 해당화가 다른 이름으로 피어나는 과정들을 지나왔다.
모란의 짙은 숨으로, 장미의 직립한 빛으로, 다알리아의 우아한 열기로— 내 안의 얼굴들은 차례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러나 어떤 꽃도 나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했다. 어떤 꽃도 내 상처와 내 빛을 함께 품지 못했다.
오히려 그 많은 꽃을 지나온 뒤, 나는 다시 처음의 화단, 엄마가 만든 그 작은 세계를 조용히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의 화단에서 처음 보는 꽃이 나를 불렀다.
해당화의 낮음과 모란의 깊음, 장미의 결과 다알리아의 심지를 품은 채 지면에서 아주 조금 떠서 수평으로 멀리 뻗어가는 넝쿨. 그 넝쿨 위에서 각기 다른 높이로 솟아오르는 봉오리들.
꿈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 꽃의 이름은 '해일리아'라고.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찾아 헤맨 꽃은 어딘가에 이미 피어 있는 꽃이 아니라, 해당화에서 비롯된 나의 오래된 계보가 모든 길을 돌아 비로소 나만의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해일리아는 내 상처와 빛, 열등과 자존, 엄마의 흔적과 나의 꿈이 한 몸에 맺힌 상징이다.
꿈이 그것을 불러내 나를 다시 깨어나게 했다.
나는 이제, 그 오래된 화단에서 시작해 아직 이름 없는 우주까지 이어지는 나만의 꽃, 해일리아를 그려 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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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서, 엄마 품의 첫 빛
— 백일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