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시인의 노트] 2025.5.9.
콩밭 매기
임미옥
끝이 보이지 않는 원고들 속에서
며칠 밤을 새우면
열여섯의 엄마가 그 자리에 앉아 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호미 한 자루 쥐고
매고 또 매고 또 매는
바다 같은 콩밭
예순여섯의 내가
볼펜 한 자루 쥔 채 매고 있다
콩밭 같은 글밭
촉촉해야 잘 뽑히는 것들
원고 사이
숨은 글자들을 집어내고
흙을 북돋아 마음의 결을 세운다
모쪼록 속이 찬 것들로
잘 여물게 하소서
허리를 펴면
마알간 하늘이 가까이 내려앉는다
✍️ 시인의 노트 ― 「콩밭 매기」를 쓰며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에 조금씩 다가간다.
며칠째 원고를 붙들고 앉아, 허리를 펼 새도 없이 밤을 넘겼다.
아침에 일어난 남편이 말한다.
“잠을 자야지.”
차로 태워다 주며 덧붙인다.
“대충대충해야지. 그거 하면 뭐가 나와?”
뭐가 나와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뙤약볕 아래서 온종일 콩밭을 매셨다는 이야기. 매고 또 매어도 끝이 없던 밭.
지금의 나는 호미 대신 볼펜을 쥐고 그와 다르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다. 남의 글을 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그 또한 나를 매는 일이었다. 무엇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북돋아야 할 마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글밭을 맨다.
허리를 펴는 순간, 그 모든 시간 위로 말간 하늘이 조용히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