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엄마의 친구

by 혜윰의 해밀

“어떤 관계는 시작보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제 이름을 얻는다. 딸은 결국 엄마의 친구가 된다.”

[심오재일기] 2026.1.19.

딸은 엄마의 친구

“엄마는 친구가 없어?”

두 딸이 번갈아 가며 내게 묻는다. 얼마 전에는 큰딸이 그런 질문을 던지더니, 어제는 독립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집에 온 작은딸이 같은 질문을 했다.


엄마인 내가 특별히 자주 만나 어울리는 친구 없이 날마다 집 안에서 책과 노트북,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친구야 여럿 있었지. 그렇지만 살다 보면 다 멀어져. 서로 삶의 방향이 다르고, 형태가 다르고, 추구가 다르니까. 한동안 어울리다가도 결국은 멀어지게 되지. 마음은 있어도 거리가 멀어 멀어지는 친구도 있고. 왜, 엄마가 외로워 보여?”


“응. 보통 아줌마들은 친구들이랑 매일 어울려 수다 떨고, 놀러 다니고 하잖아. 근데 엄마는….”


글쓰기 교실에 오는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라 제자라는 이야기, SNS 친구들은 관계라기보다 연결에 가깝다는 이야기, 어쩌다 만나는 문인들은 친구라기보다 동료라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작은딸은 집을 떠나 얼마간 홀로 생활하다 보니 문득 외로워진 게 분명했다. 일과 바이올린밖에 모르고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 일마저도 과중하고 불안정해, 얼마 뒤면 그만두고 또 새 직장을 찾아야 한다. 어쩌다 보니 나이는 어느새 마흔을 향해 가고, 주변 친구들은 사네 못 사네 해도 가정을 꾸려 살고 있는데 자신은 혼자라는 느낌이 더 또렷해진다.


그러니 공연히 엄마의 외로움이 투사되어 보이고, 엄마는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친구는 영혼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엄마와 딸은 그런 관계에 가장 가까운 사이인지도 모른다.


“엄마, 날 인싸로 키우지 그랬어?”

“그만하면 인싸지. 더 어떻게 뭘?”

“아니, 일찌감치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고, 소개팅도 하루 몇 건씩 하는 그런 인싸 말이야. 지금 보면 그런 애들이 좋은 남자 만나 더 잘 사는 것 같아. 나는 맨날 이상한 인간들 치다꺼리만 하다가 세월 다 갔어.”


작은딸은 이십 대 중반부터 삼십 대 후반인 지금까지 학생 심리상담과 범죄자/피해자 분석, 그리고 인권상담을 계속해 왔다.


“그래. 이제 좀 편히 살아. 근데 넌 인싸 그런 건 하라고 해도 못해. 사람이 다 다르게 생겼거든.”


결국 난자 동결과 결혼정보회사 이야기가 나오고, 만혼 여성이 많아진 현실, 배아 이식 성공률 같은 이야기로 대화는 흘러간다.


예전엔 자연스러웠던 일들이 왜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하지만 어떤 세대든 그 세대만의 기류가 있고, 기류라는 것은 또 변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안에서 어떻게 자기를 지켜 나가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직장 끊기면 엄마랑 이것저것 알아보고, 성지순례나 가자.”


나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성지순례는 꼭 한번 가고 싶었다. 그리고 되도록 딸들과 함께 가고 싶었다. 그동안 기회가 없었는데, 작은딸이 모처럼 여유를 가진다면 그야말로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 엄마.”


저에게 챙겨 보낼 멸치볶음을 만들기 위해 멸치를 손질하며 한 식경 주고받은 이야기들이다. 종달새처럼 종알종알 밀린 이야기를 풀어놓던 딸이 문득 말한다.


“엄마랑 이야기하니까 좋다. 엄마랑 노니까 재밌다.”

“그치? 딸은 나이 먹으면 엄마의 친구가 된단다. 엄마는 남들 없는 친구가 둘이나 돼.”


작은딸은 밤늦게서야 내가 이것저것 마련해 준 먹을거리를 싣고 운전대에 앉는다.


“주님, 언제나 딸의 안전을 지켜 주시고, 딱 맞는 배필과 나와 같은 친구를 갖게 해 주소서.”


나는 저만치 멀어지는 작은딸의 차 뒤에 대고 성호를 그으며 기도드린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외로움을 먼저 알아보고, 그 곁에 조용히 다가앉을 줄 알게 되는 일이 아닐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얻기보다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수다는 줄고, 이름은 남아도 자리는 비어 간다.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견뎌왔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 누가 그 자리에 조용히 와 앉는지, 그것은 살아 본 사람만이 알게 되는 일이다.

♤ 메리 카사트, 「The Conversation」, 1896.

– 말이 오가기 전부터 이미 서로를 아는 사이.

월, 화, 수 연재
이전 18화심장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