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바꾸는 가장 작은 파동에 대하여
나는 왜 여전히 쓰는가
— 세상을 바꾸는 가장 작은 파동에 대하여
2026.2.14.
글쓰기에 대한 한 편의 뛰어난 글을 읽었다. 정치 평론가 박주현의 글이다. 이 글은 '정치 평론가의 우울'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말은 세상을 바꾸는가.'
'나는 왜 계속 말해야 하는가.'
그의 글은 솔직하고 정교하다. 분노가 도파민이 되어 문장을 밀어 올리는 순간, "이건 말도 안 된다"는 울분이 기관총처럼 쏟아지는 장면은 생생하다. 그리고 글을 올린 뒤 찾아오는 '무용의 시간'. 그 명명은 정확하다. 열정 뒤의 고요, 고요 뒤의 허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라는 질문이 노동의 가치를 0으로 수렴시키는 감각. 그 정직함은 이 글의 가장 큰 힘이다.
또 하나 인상 깊은 장면은 구두 닦기였다. 거대한 정치의 세계는 통제되지 않지만, 30cm 구두의 세계는 손길이 닿는 즉시 빛난다. 추상과 물성의 대비. 세계는 불투명하지만, 가죽은 닦으면 광택이 오른다. 그 단순하고 집요한 반복 속에서 그는 작은 효능감을 회복한다. 그리고 댓글 하나가 도착한다. "님 글 보고 속이 뻥 뚫리네요." 그 짧은 문장은 구조 신호가 되고, "위로가 됐다"는 말 한 마디는 그를 다시 책상 앞으로 돌려보낸다.
이 글은 충분히 잘 쓰였다. 그러나 읽는 내내 어딘가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세상은 논리로 바뀌지 않는다. 인간은 설득되지 않는다."
이 단정에서 나는 잠시 멈추었다. 그 문장은 현실 인식으로는 정직하지만, 동시에 체념의 색을 띤다. 그는 글쓰기를 혁명이 아니라 깃발 흔들기로 정의한다. 고립된 개인들에게 "당신 생각과 같은 사람이 여기 있다"고 알리는 일. 그 태도는 신중하고 건강하다. 그러나 거기서 멈춘 듯한 인상도 남는다.
그는 묻는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쓰는가.
아니면 고립되지 않기 위해 쓰는가.
그의 글은 후자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그 둘이 다른 말이 아니라고 본다. 고립이 끊어지는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된다. 연결은 위로에 머물지 않는다. 연결은 운동(運動)이다. 보이지 않는 파동이 장(場)을 이동시킨다. 한 사람의 의식이 다른 의식을 만날 때, 집단의 분위기는 미세하게 달라진다. 그 미세한 이동이 축적되면 결국 구조도 움직인다.
나는 가톨릭 신앙인이다. 성경은 외부 시스템을 먼저 고치라고 말하기보다, 한 사람의 심령이 거듭날 때(Metanoia) 그가 속한 가정과 공동체, 나아가 세상이 변한다고 가르친다. 메타노이아는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다. 한 사람의 내적 전환이 첫 번째 파동이 된다.
그리고 그 파동은 홀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코이노이아’(Koinonia), 곧 하느님과의 연결이며 성인의 통공 안에서 이어지는 성도 간의 친교다. 보이는 댓글과 보이지 않는 독자 사이의 만남 또한, 그 친교의 작은 연속선 위에 있다.
나는 영성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며 '나로부터의 변화'를 배웠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길이라는 것을 삶으로 확인해 왔다.
의식과 의식이 만날 때 집단의 장은 변한다는 통찰 역시, 나에게는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다.
나에게 구두는 글과 동의어다. 구두를 닦는 일은 한 편의 글을 다듬는 일과 같다. 정신(精神)이든 신(履)이든, 닦을 때 빛난다. 글쓴이는 광이 오른 구두를 신고 세상으로 나가듯, 다듬어진 문장을 신고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만남 속에서 세계는 조금씩 이동한다.
나는 글을 쓰기 전 머리를 빗고, 글을 올린 뒤에는 설거지를 한다. 머리 빗질은 생각을 정돈하는 일이고, 설거지는 남은 감정의 찌꺼기를 닦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피가 아니다.
말 → 침묵 → 정돈 → 다시 말.
그 순환은 또 하나의 글쓰기다.
만약 댓글이 하나도 달리지 않는다면, 그래도 쓰겠는가.
나는 쓴다. 연결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의 독자와라도.
보이지 않는 독자는 존재한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혼자 읽고 삶의 방향을 1도 수정하는 사람. 1도는 작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길이 된다. 나는 그 1도를 신뢰한다.
그래서 나는 연결을 신뢰한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기 때문이다. 내가 변할 때 관계가 달라졌고, 관계가 달라질 때 공동체의 공기가 바뀌었다. 나는 지금 적은 범위 안에서, 글쓰기를 통해 그 파동을 가족과 '나를 쓰는 글쓰기' 참여자들, 그리고 페이스북과 브런치북 친구들에게 확산시키고 있다. 이것은 나에겐 직업이 아니라 미션이다.
세상은 논리 하나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연결된 사유의 축적은 결국 지형을 바꾼다.
나는 위로에 머무르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 그보다 운동을 남기는 글을 쓰고 싶다. 한 사람의 메타노이아가 또 다른 사람의 방향을 바꾸고, 그 작은 전환이 조용히 퍼져나가는 장면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문장을 빗는다.
나로부터의 변화 저편의 한 사람을 향해.
☆ 박주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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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귀스트 르누아르, <머리 빗는 소녀>, 189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엉킨 생각을 풀고, 과열된 감정을 식히고, 흩어진 의식을 한 줄로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