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극의 통합을 향해

–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뱀처럼 지혜로워라

by 혜윰의 해밀

대극의 통합을 향해

–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뱀처럼 지혜로워라


“제가 순수하지만 순진하지는 않습니데이. 순진한 거는 무지한 거고요. 순수한 거는요, 선과 악이 있는 것도 다 알아요. 정의와 부정이 있는 걸 알아요. 순진한 거는 그 자체를 모르는 거고요. 순수한 것은요.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이 있으면 나는 악이 아니라 선을 선택하고, 불의가 아니라 정의를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 있는, 그러면서도 선을 선택하는 이런 것을 우리가 순수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해맑은 게 그런 거죠. 저는 그 정도는 구분합니다. 적어도 제가 그렇게... 우리 성경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이렇게 했지 않습니까.”

— 전한길


얼마 전 일런 머스크가 사람들의 뇌를 썩게 할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던 숏폼 영상을 보다가, 우연히 전한길 씨의 짧은 영상을 접했다. 그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내가 오래 붙들고 있던 생각을 그가 아주 직관적인 말로 짚어 주었기 때문이다.


성경과 함께 융의 분석심리학을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두 축으로 삼고 있는 나는, 이 말을 즉시 융의 언어로 다시 풀어 보고 싶어졌다. 요즘처럼 혼돈스러운 시대에 스스로의 순수함과 순진함을 혼동하는 이들에게도 하나의 분별 기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전한길 씨의 말은 겉으로 보면 도덕적 태도에 대한 상식적 설명처럼 들린다. 그러나 융의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이 짧은 말 속에는 의식의 분화, 그림자 인식, 대극의 통합, 그리고 개성화의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다. 핵심은 순수함을 무지가 아니라 의식적 선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그가 말한 “순진한 것은 무지한 것”이라는 표현은 융의 관점에서 의식이 아직 충분히 분화되지 않은 상태와 연결된다. 융에 따르면 인간은 처음부터 선과 악을 분명히 구별하는 존재가 아니다. 초기의 의식은 무의식과 충분히 분리되지 않았고, 자신의 공격성이나 욕망, 파괴성 역시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 쉽다. 이때 판단은 내적 성찰보다 외부 규범이나 집단 분위기에 더 크게 좌우된다. 그러므로 순진함은 윤리적으로 고귀한 상태라기보다, 아직 자기 인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미분화 상태에 가깝다.


반대로 전한길 씨가 말한 순수함은 융의 그림자 개념과 맞닿아 있다. 그는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을 알고도 선과 정의를 택하는 상태를 순수함이라고 말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융에 따르면 인간의 성숙은 자기 안의 그림자, 곧 공격성, 욕망, 악의 가능성을 보지 못한 채 착한 사람으로 남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 안에도 어둠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것에 지배되지 않으려는 의식적 노력이 성숙의 시작이다. 그런 점에서 순진함은 악을 모르는 상태이고, 순수함은 악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인용한 성경의 표현,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뱀처럼 지혜롭게”는 융적으로 보면 대극의 통합을 떠올리게 한다. 비둘기는 순수, 선의, 무해함의 상징이고, 뱀은 본능, 지혜, 생존 감각, 때로는 교활함까지 품은 상징이다. 사람들은 흔히 둘 중 하나만 택하려 한다. 순수만 지키려 하면 현실 감각이 약해져 순진함으로 기울고, 지혜만 강조하면 냉소와 계산으로 기울기 쉽다. 그러나 융의 개성화는 둘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길이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요소를 더 높은 차원에서 함께 견디고 통합하는 길이다. 비둘기와 뱀을 함께 품는 것, 그것이 곧 성숙한 인격의 조건이다.


이렇게 보면 전한길 씨의 발언은 개성화의 한 단면을 짚고 있다. 의식이 선과 악을 분별할 만큼 분화되고, 자기 안의 그림자를 인식하며, 그 위에서 자아가 자기(Self)의 요청에 응답해 의식적으로 선을 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단순한 착함을 넘어선 윤리적 성숙이다. 융의 언어로 요약하면, 순진함은 그림자를 모르는 미분화 상태이고, 순수함은 그림자를 인식한 이후에도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성숙한 의식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조는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사회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융은 개인 심리와 집단 심리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개인에게 무의식이 있듯 집단에도 집단무의식이 있고, 개인에게 그림자가 있듯 사회에도 집단적 그림자가 있다. 그것은 역사적 폭력, 억압, 배제, 위선, 부정의 같은 형태로 드러난다. 또한 개인이 사회적 가면으로서 페르소나를 가지듯, 집단 역시 이념, 체제, 국가 이미지 같은 집단적 페르소나를 만들어 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순진한 사회란 자기 그림자를 모르는 사회다. 자신들의 폭력과 부정을 인정하지 않고, 문제의 책임을 언제나 외부 집단에 돌리며, “우리는 본래 선하다”는 집단적 자기 이미지에 집착하는 사회가 그렇다. 융이 말한 투사는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집단도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한 어두운 면을 외부의 적에게 덧씌운다. 정치적 적대 집단을 악마화하고, 역사 속의 폭력을 부정하며, 자기 내부의 모순을 타자에게 떠넘기는 사회는 심리적으로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순수한 사회는 자기 그림자를 인식할 수 있는 사회다. 역사적 폭력을 인정하고, 제도적 부정을 성찰하며, 집단적 책임을 논의할 수 있는 사회가 그렇다. 이때 그림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도덕적 의식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개인이 자신의 그림자를 볼 때 비로소 윤리적 선택이 가능해지듯, 사회도 자신의 어두운 역사를 직면할 때에만 정의를 더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유의할 점도 있다. 융은 개성화라는 개념을 개인의 심리 과정에 사용했지, 사회 전체에 직접 적용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집단의 개성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개인의 의식 성장과 집단의 의식 확대 사이에 구조적 유비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가 성숙한다는 것은 집단 전체가 하나의 인격처럼 개성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과 제도와 담론이 집단적 그림자를 더 잘 인식하고 투사를 줄여 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뜻에 가깝다.


그럴 때 민주주의 역시 더 성숙해질 수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인간을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로 낭만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안의 어둠과 권력의 유혹, 집단 광기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위에서 자유와 질서, 권리와 책임,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긴장을 의식적으로 조율해 가는 체제다. 그런 사회야말로 심리적으로도 성숙에 가까운 사회라 할 수 있다.


결국 전한길 씨의 이 짧은 발언은, 융의 언어로 다시 읽을 때 뜻밖에도 깊어진다. 순진함은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한 미분화 상태이고, 순수함은 그림자를 인식한 이후에도 의식적으로 선과 정의를 선택하는 성숙한 상태다. 그리고 같은 구조는 사회에도 반복된다. 자신의 집단적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 어둠을 인식한 채 더 의식적으로 선과 정의를 선택해 가는 사회, 그런 사회만이 심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더 성숙한 민주주의에 가까워질 수 있다.


♤ 카라바조(Caravaggio),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594,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빛과 어둠 사이에서 인간의 죄와 선택이 드러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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