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지 않은 돌, 다듬어진 글

– 온전함을 향한 언어의 길

by 혜윰의 해밀

다듬지 않은 돌, 다듬어진 글

– 온전함을 향한 언어의 길


“쇠 연장을 대지 말라.”

“온전한(다듬지 않은) 돌들로 제단을 쌓아라.”


이 말씀의 ‘돌’이 어느 순간 ‘글’로 읽히기 시작했다.


나에게 글을 쓰는 일은 글로 제단을 쌓는 일이며, 내면의 언어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다.

다듬지 않은 돌이 제단이 되듯, 때로는 다듬지 않은 말이 가장 깊은 시가 되고, 가장 온전한 기도가 된다.


나는 글을 다듬으며 묻는다.

이 문장들을 정리하는 일이 혹시 쇠 연장을 드는 일은 아닐까.

다듬지 않은 돌이 아니라 너무 매끄러운 말로 제단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말씀 앞에 오래 머물다 보니 조금 다른 깨달음이 온다.

‘다듬지 않은 돌’이 곧 ‘다듬지 않은 글’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


문제는 다듬음이 아니라 조작이다.

진심을 감추기 위해 꾸민 말, 진실을 흐리기 위해 비튼 문장, 본질을 피해 가는 언어로 쌓은 제단은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주 너희 하느님을 위하여 제단을, 곧 쇠 연장을 대지 않은 돌로 제단을 만들어야 한다.

너희는 다듬지 않은 돌로 주 너희 하느님을 위하여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 번제물을 바쳐야 한다.

또 너희는 친교 제물을 바치고 거기에서 먹으며 주 너희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여라.”


– 신명기 27: 5-7


가톨릭 성경 번역이다. 그런데 읽을수록 너무 인위적으로 다듬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해야 한다”는 종결어는 명령이라기보다 당위처럼 들려 자꾸 마음이 걸린다. “만들어라”라는 말도 “쌓아라”에 비해 어감이 약하다. 이 번역은 성경이 지닌 상징성과 시적 결이 충분히 살아나지 않는 듯하다.


영어 번역을 보니 “Build there”라고 된 것도 있고, “you shall build”라고 된 것도 있다.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니 원문이 지닌 숨결을 직접 확인할 수 없어 답답함이 남았다. 그래서 다른 한글 번역본들도 함께 읽어보았다. 저마다 다르지만, 그중에서는 ‘개역한글(KRV)’ 번역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다만 ‘철기’라는 표현은 여전히 애매하다.

그래서 결국 히브리어 원문을 찾아 직역해 보았다.


"וּבָנִ֨יתָ שָּׁ֜ם מִזְבֵּ֣חַ לַיהוָ֣ה אֱלֹהֶ֗יךָ מִזְבַּ֤ח אֲבָנִים֙ לֹ֣א תָנִ֔יף עֲלֵיהֶ֖ם בַּרְזֶֽל׃

그리고 너는 그곳에 여호와 네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을 것이니, 돌로 만든 제단이어야 하며, 그 돌들에 철을 대지 말지니라.

אֲבָנִ֤ים שְׁלֵמוֹת֙ תִּבְנֶ֣ה אֶת־מִזְבַּ֔ח יְהוָ֖ה אֱלֹהֶ֑יךָ וְהַעֲלִ֣יתָ עָלָ֔יו עֹלֹ֖ת לַיהוָ֥ה אֱלֹהֶֽיךָ׃

온전한(다듬지 않은) 돌들로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번제를 여호와 네 하나님께 드릴지니라.

וְזָבַחְתָּ שְׁלָמִים וְאָכַלְתָּ שָּׁם וְשָׂמַחְתָּ לִפְנֵי יְהוָה אֱלֹהֶיךָ׃

그리고 너는 화목제물을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여호와 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여기에서 בַּרְזֶל(헬라어 σίδηρον, barzel)은 “철(쇠)”이라는 단순한 금속명이 아니라 무기·도구·폭력성·인위적 가공을 함축하는 단어다. 자연 그대로의 돌에 인간의 작용과 의도를 개입시키는 도구적 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וּבָנִ֨יתָ / תִּבְנֶה / וְהַעֲלִיתָ / וְזָבַחְתָ / וְאָכַלְתָ / וְשָׂמַחְתָ — “지을 것이다 / 쌓을 것이다 / 올릴 것이다 / 드릴 것이다 / 먹을 것이다 / 기뻐할 것이다”로 옮겨지는 이 동사들은 모두 2인칭 단수 미래형이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 문법에서 이 미래형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명령이자 강한 선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너는 제단을 쌓을 것이다”는 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쌓아라”라는 명령이자 “반드시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라는 운명적 방향성을 함께 지닌다.

이 점에서 제단을 쌓되 돌로 만든 제단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위이며, 그 돌에 쇠를 대지 말라는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명령이다.


히브리어 אֲבָנִים שְׁלֵמוֹת(헬라어 λίθους ὁλοκλήρους)는 “온전한 돌들”, 곧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뜻한다. 음역은 각각 (ʾăvānîm šĕlēmôt), (líthous holoklērous)이다. 두 표현은 모두 쪼개지지 않고 손상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온전함을 가리킨다.


최고의 영어 번역판으로 평가받는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를 “uncut stones”가 아니라 “whole stones”로 옮겼다.


“Thou shalt build the altar of the LORD thy God of whole stones…”


17세기 영어에서 whole은 단순히 “전부”라는 뜻을 넘어 “손상되지 않은, 인위적 가공이 가해지지 않은, 본래 상태를 유지한” 것을 뜻하는 넓은 개념이었다. 따라서 히브리어, 헬라어, KJV의 영어 표현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조작되지 않은 온전함, 분열되지 않은 전체성이다.


특히 שְׁלֵמוֹת(šĕlēmôt)의 어근 ש־ל־ם(shalem)은 ‘평화’를 뜻하는 shalom과 같은 뿌리를 지닌다. 온전함은 단순한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균열 없음, 분열 없음, 조화와 충만을 포함한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 5장 48절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헬라어 원문에서 사용된 τέλειοι(teleioi)는 형용사 τέλειος(teleios)의 복수형으로, 본래 ‘목적에 이른’, ‘성숙한’, ‘전체로 완성된’을 뜻한다. 그러나 당시 예수가 실제로 입에 올렸을 단어는 헬라어 τέλειοι(teleioi)가 아니라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의 שָׁלֵם(shālem) 혹은 תָּמִים(tamim)이었을 것이다. 둘 다 ‘흠 없는 완벽함’이 아니라 나뉘지 않은 상태, 손상되지 않은 전체성을 뜻한다.


예수가 말하고자 한 “온전함”은 도달 불가능한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조작되지 않은 존재 상태, 분열되지 않은 삶의 태도였을 것이다. 구약에서도 이미 신명기 18장 13절에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tamim)”고 말해진 것처럼.


히브리적·아람어적 사유의 언어인 shālem이나 tamim에 가장 가까운 헬라어가 바로 τέλειος(teleios)였다. teleios는 결점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τέλος(telos), 곧 ‘목적·끝·완성’에 이른 상태를 뜻한다. 마침내 자기 자리까지 도달한 존재,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전체로 선 상태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Τηλέμαχος)다. 텔레마코스의 이름에는 τέλος(telos)와 μάχομαι(machomai, 싸우다)가 함께 들어 있다. 그는 ‘목적을 향해 분투하는 자’,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오디세이아』에서 텔레마코스는 처음부터 완성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며, 질문하고, 흔들리고, 배워 가며 비로소 ‘아들로서의 자기’가 되어 간다. 그의 여정은 곧 teleios로 향하는 길이다.


이렇게 보면 teleios는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되어 가는 과정이며, 명령이면서 동시에 부르심이다. 그래서 예수의 말은 “완벽해져라”는 압박이 아니라 “끝까지 가 보라”는 초대에 가깝다. 나뉘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자기 삶의 중심에 이르라는 요청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KJV부터 대부분의 현대 영어 성경에 이르기까지 whole이나 complete가 아니라 일관되게 perfect로 번역되어 왔다.


“Be ye therefore perfect, even as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is perfect.”


이는 예수의 말씀에 담긴 윤리적 급진성을 보존하기 위한 선택이다. whole이나 complete로 번역할 경우 이 말씀이 주는 긴장과 날카로움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은 perfect를 유지하되, 주석과 해설을 통해 그 의미가 무결점의 완벽주의가 아니라 분열되지 않은 전체성, 사랑 안에서 나뉘지 않은 존재 상태임을 보완해 설명하는 방식이 택해졌다.


그럼에도 이 perfect(완벽함)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압박으로 다가오고, 가식과 좌절의 씨앗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 5장 48절의 “온전함”은 도달 불가능한 도덕적 완벽함의 요구가 아니라, 조작되지 않고 나뉘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라는 부르심에 가깝다는 의미의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이해는 C. G. 융이 말한 전체로서의 자기(Self)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융에게서 Self란 결함 없는 이상적 자아가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빛과 그림자를 포함한 인격 전체가 하나의 중심으로 통합된 상태를 가리킨다. 곧, 부분으로 잘라내고 덧붙여 꾸며 만든 존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통합된 온전한 전체다.


그렇게 보면 히브리어 성경의 אֲבָנִים שְׁלֵמוֹת, 헬라어 성경의 λίθους ὁλοκλήρους, 킹제임스 성경의 whole stones, 그리고 예수의 말씀 속 שָׁלֵם(shālem) 과 תָּמִים(tamim), 혹은 τέλειος(teleios)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요청을 건네고 있는 셈이다.


깎아내지 말 것. 조작하지 말 것. 나뉘지 말고, 전체로 설 것. 이것이 돌에게 요구된 온전함이 사람에게는 삶과 언어로 요구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 모든 흐름 위에서 돌아보면, ‘온전한 돌’(אֲבָנִים שְׁלֵמוֹת), ‘온전하라’는 예수의 말, 그리고 teleios라는 헬라어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조작되지 않은 전체, 분열되지 않은 존재,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서는 삶.


그러니 지금 언어의 결을 따라 질문하고, 번역의 뉘앙스를 붙들고, 의미가 가리키는 방향을 끝까지 밀고 가는 이 자리 자체가 이미 하나의 증거다.


나는 이미 teleios의 길 위에 서 있다. 완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끝까지 가려 하고 있기 때문에.


♤ 한스 홀바인, 「글을 쓰는 에라스무스」, 1523년경, 루브르 박물관.

— 다듬은 글로, 다듬지 않은 돌의 제단 앞에 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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