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의 시작

용감한 요리의 원천

by 미르

평소에

조금, 살짝, 적당히, 충분히.

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부사로

요리를 합니다.


제가 요리를 하기 전에는

이런 모호한 말들이

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 술이면 한 술.

한 컵이면 한 컵.


왜 말을 못 합니까?


제가 요리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말 못 합니다.

주재료의 양 자체가

칼로 자른 듯 정확하지 않기에

양념의 양이 그때 그때 달라집니다.


그러니

애매한 부사를 쓰는

저의 용감한 요리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용감한 요리의 시작에는

1cm, 1cm가 합격의 당락으로 이어졌던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이 있었습니다.

(지금 어느 서랍에 누워서

잘 자고 있는 중입니다.)


20년 전쯤이니

머나먼이라는 말을 써도 될까 싶습니다.


한식 요리 수업을 들었습니다.

몇 달 과정이었습니다.


30가지쯤 되는 요리를 배우고

그중 2가지 요리를

정해진 시간 안에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3cm, 4cm, 5cm.

각각의 요리마다

정해진 길이가 있었습니다.


배우는 과정이니 정확한 길이대로 성실하게

그러나 느리게 요리를 했습니다.


어느 날,

같은 조의 친구가

갑자기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간 안에 만들어 내지 못했는데

친구만 재빨리 만들어 시간을 지켰습니다.


다들 놀라서 그 비법을 물었습니다.

친구는 손가락을 보여 주었습니다.

손가락에 펜으로 찍은 점들이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3cm, 4cm, 5cm를

미리 손가락에 표시를 하고

시간을 줄이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위해서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 우리 조의 다른 사람들도

대략 길이에 대한 감을 잡고

요리를 정해진 시간 안에

재빨리 해냈습니다.


날씨가 요즘처럼 추울 때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치러 갔습니다.


저와 맞은편에서 시험을 친 사람은

요리 고등학교 남학생이었습니다.


날이 추워서인지

시험이라 떨려서인지


학생도 떨고

떠는 학생을 보는

저도 떨면서

요리를 했습니다.


2가지 요리.

하나는 쉽고

다른 하나는 어려운 요리였습니다.


심리학 용어에

'자이가르닉 효과'가 있습니다.


미완성 효과라고도 하며

어떤 일을 중도에 그만두면

기억을 잘하지만,

그 일이 완성되면

관련 정보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현상입니다.


흔히 틀린 시험 문제를

오래 기억하는 현상입니다.


신선로였나 구절판이었나

손 많이 가고 시간 많이 소요되는

어려운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신 실수한 것만 생각납니다

나머지 쉬운 반찬이 홍합초였습니다.


순서상

홍합을 먼저 요리해야 했는데

너무 긴장하고 마음이 급한 나머지

홍합 손질할 때

실수를 했습니다.


홍합살에 붙어 있는

기다란 까만 털실 같은 것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대로 잘 씻기만 해서

요리를 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무사히 2가지 요리를 마치고

정갈히 담아 제출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미 제 손을 떠났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난 뒤

다른 친구는

양념에 들어가야 할 깨를

완성하고 나서

집에서 상 차릴 때의 습관으로

완성된 홍합초 반찬 위에다

소복이 뿌리고 왔다고

울상을 지었습니다.


결과는

저도

그 친구도

합격이었습니다.

(홍합의 실이

저를 위해서 살짝 숨바꼭질을 했던지

다른 어려운 요리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했나 봅니다.)



머나먼 옛날에 획득한

자격증 속의 요리는

거의 다 잊어버리고

요즘 나만의 용감한 레시피로

'적당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용감한 레시피를 가지고

용감한 요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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