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 생산자

겨울에는 누룽지

by 미르

부산의 겨울에

눈은 거의 오지 않습니다.


날은 어마어마하게

춥습니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는 누룽지.

누룽지를 만듭니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굉장히 쉬워서

요리라 하기에는 뭣하지만

글을 써 봅니다.


작은 누룽지팬이 있지만

성이 안 찹니다.

프라이팬으로 본격적으로 만듭니다.


찬밥을 사용해도 되지만

따뜻한 밥이면 더 좋습니다.


한 주걱 밥을 퍼서

프라이팬에 눌러 줍니다.


꽉꽉 꽉꽉 쫙쫙 쫙쫙

골고루 골고루 눌러 줍니다.



이제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약불에 20분 정도.

타이머를 맞추고 기다립니다.


그냥 기다리면 심심합니다.

책을 읽어도 됩니다.

혹은 누룽지가 익어 가는

가스레인지 주변에서

그동안 신경을 쓰지 못한

주방 정리를 합니다.


글을 쓰면서

우선순위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 우선순위에 올라 있다가

이제는 희미해진 주방 살림들이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에게도 관심을 가져 달라.

나도 여기 있다.'


'오냐, 너 거기 있었구나.

나랑 한 번 만나보자.'


서랍 하나하나씩

정리를 해 나갑니다.


앗, 이번에는 타이머가

저를 부릅니다.


조심조심

휘리릭 뒤집기.


꽉꽉 꽉꽉 쫙쫙 쫙쫙.

(의태어의 모양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중 자음을

계속해서 자판을 누르려니 귀찮군요.

복사 + 붙여 넣기로 해결했습니다.)


다시 힘을 씁니다.

살짝 더 눌려도 되지만

시간과의 밀당이 힘들어

이만 만족하기로 합니다.


그냥 먹어도 맛있고

물을 넣고 뜨끈하게 끓여

누룽지 죽으로 먹어도

아주 맛있습니다.


짜잔,

뒷면을 보십시오.

아주 멋진 누룽지가 탄생했습니다.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어느 겨울,

행사가 있어 유치원에 갔습니다.


유치원 담임 선생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아침에 있었던 좋은 일 말할 사람?'

이렇게 질문을 했답니다.


그러자

지금은 흑백인간이지만

분홍 집착 절정이던

분홍인간 딸이

손을 번쩍 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래요.


'아침에 누룽지 먹고 왔어요.

좋아하는 누룽지 먹어서 좋았어요.'


와, 짝짝짝~

아이들의 박수.


아,

겨울 아침에

유치원 가는 딸을

급히 깨워

아주 간단하게

달걀 간장 밥을 먹이던가

김에 김치 싸 먹이던가

누룽지 먹여

보내던 때였습니다.


누룽지가 뭐라고.

그걸 행복하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고 합니다.


이걸 제가 기뻐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작은 누룽지죽 하나로

좋았다고 하니

기쁘기도 하고


부실한 아침 식사가

미안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 이 글을 쓰면서

그때 상황에 대해

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는 말,

" 나, 누룽지 안 좋아하는데?"


음, 입맛이 변하기도 합니다.)


어릴 적에

저는 잘 먹지 않았던 누룽지를

요즘은 귀하게 즐겨 먹습니다.


바쁜 와중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

꾹꾹 힘을 써서

누룽지를 생산합니다.


입맛이 변하는 것이

맞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것이 바뀝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고

이렇게 변하는 것도

있습니다.


딱딱했던 누룽지가

노골노골 구수한

부드러운 누룽지 죽이 되어

변하듯이


저도 좀 더 부드럽고

여유 있는 구수한 인간으로

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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