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교재를 든 품새며 누가봐도 딱 수강생이다. 그런데다 빡빡머리를 한 웬 화장기 없는 동양 여자가 강의실에 들어와서는 수강생 자리를 그냥 지나치더니 교실 앞쪽 교탁에 가서 턱하니 선다.
언제나처럼 첫강의를 시작하자마자 강의실은 일렁인다. 열다섯명 남짓 모여앉은 각양각국의 사람들에게서 호기심과 의아함, 기대감과 미심쩍은 마음들이 순식간에 치솟았다가 좀처럼 내려앉지 않는다. 이 때를 기다려 나는 개의치 않고, 늘 하던대로 다짜고짜 강의실 앞쪽 누구나 잘 볼수 있도록 크게, 망설임없이 단숨에 쓴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다.
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
그 밑엔 잊지 않고 적는다.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독일어가 모국어였지만, 영국으로 건너가 외국어인 영어로 학문을 펼친 오스트리아 태생의 언어철학자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한다는 또다른 자주 인용되는 말로도 언제나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어떤 레벨의 어떤 반이 개설된 것에 상관없이 내 첫강의는 늘 이 글귀와 함께 시작한다. 이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서 나는 한 곳에 우뚝 붙박혀 서서 움직임이나 말없이 수강생 모두와 첫인사를 대신해 한명 한명 정성을 다해 눈을 맞춘다.
그래요. 당신이 무슨 이유가 되었든, 배우는 일이 예전같지 않은 나이에 익히기 만만찮은 외국어인 독일어를 배우러, 여기 와 있는걸 내가 잘 알겠어요. 그 일이 어쩔땐 조금은 쓸쓸할지도 모르지만 잘 오셨어요,란 뜻이다.
희망하건데 이 세상 모든 모국어로 아무 문제없이 옮길수 있는 이 첫인사를 나누는 동안, 늘 그렇듯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호기심으로 환한, 몇몇 빛나는 얼굴들이다. 이들은 지금 당장은 해독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내가 칠판에 적은 저 말의 함의를 가장 먼저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언젠가는 심지어는 미소와 더불어 수긍하게 될 것이다.
마음은 길 없이,
말 없이도
내가 독일어를 가르치는 것을 일삼아 하면서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정작 무엇인지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언젠가는 간파하게 될 것이다. 마음은 길 없이도, 말 없이도 넘나들며 닿는다는 것이 외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통해 배운 역설이다.
독일에서 산 약 절반의 시간인 10년을 제2언어로서의 독일어( DaZ, Deutsch als Zweitsprache)를 일삼아 가르치면서 살았다. 오랜동안 이민국의 정체성을 주저하던 독일이 10여년 전쯤부터 이주자들에게 마지못해나마, 뒤늦게나마 국경을 활짝 열며 치렀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인간적 시행착오의 홍역을 이주자 출신의 독일어 강사인 나도 혹독하게 함께 치러야했다.
앞으로 펼쳐질 이 개인적인 경험의 기록이 이민자에 적대적인 극우정치의 준동으로 극도로 첨예한 독일의 최근 사회/문화의 지형과 짧고 굴곡진 이민사의 조망을 돕는데 작은 역할이나마 해낼수 있다면 기쁘겠다.
유별난 언어
독일어의 매력과 도전
한편, 가르치며 오히려 내가 배우게 된 것들이 많다. 독일어라는 언어가 가진 매력과 도전을 지식의 차원에서 학생은 물론 일선의 독일어 강사에게 전달하는 노하우도 이제 제법 그들과 나누고 되돌려줄 수 있을만큼 쌓여간다. 어느샌가 10년 파들어간 우물에 우묵하게 길어올릴 물이 차올랐다.
사람을 만나
사람에게 배운 것들
또 내게 언어를 가르치는 일은 사람들을 만나 사람에게서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오프라인으로, 온라인으로 지구 곳곳에서 살아가는 많은 분들께 내가 배운 것들은 훨씬 더 많고 소중하다. 학생과 강사의 인연을 넘어 존경과 애틋함을 나누는 인연이 된 분들께 내가 배운 것들도 다시 나누고 싶다.
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즐기는 일이다. 남김없이 말해지고 한톨의 오해없이 이해되는 것은 실은 없다는 우리의 끝없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AI와 함께
독일어 배우기와 가르치기
이 모든 것들을 찬찬히 기록해 남겨야할 때가 되었다. AI의 등장으로 외국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도 큰 변화가 왔다. 교수법과 강의내용의 혁신이 필요해졌고 실제 외국어 학습의 전 분야를 아울러 혁명이라고 할만한 변화가 매일매일 숨가쁘게 일어나고 있다. 독일어를 포함한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분명, 인공지능과 함께 달라질 것이고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거기서 도무지 달라지지 않을것도, 달라지지 않아야할 것도 분명있다. 때문에 두 가지 이야기를 다 해보고 싶다. 이 세상 모국어들이 사는 별들이 있다면, 그 별을 넘어서도 갈 것들을 적어내려 가고 싶다. 이 일이 결국에는 우리 자신의 확장을 이루는데 작은 쓰임이 되기를 겸허하게 소원하며, 이제부터 이어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