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를 배워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독일어를 배우는 만가지 이유

by 미라

첫번째 질문


지금까지 약 10년 동안 지구의 모든 대륙을 총 망라해 구석구석 곳곳에서, 독일어를 배우려는 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에게 내가 제일 처음 만나 진심으로 묻는 것은 "당신은 왜 독일어를 배우길 원.하.는.가"이다.


이들의 대답은 우선 크게 두 개의 모듬으로 나뉜다. 배우고 싶은 사람들과 배워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기꺼이 배우고, 다른 누군가는 등 떠밀려 배운다. 되물을 필요도 없이 두 번째 모듬에 속한 사람들의 독일어 여정은 첫번째 것보다 길고 고되다.


당신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필요한 충만한 에너지와 시간, 노력을 쏟아 부을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럼 우린 함께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을 돕기 위해 똑같은 일을 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름: J. (국적: 페루, 처음만난 당시 레벨: C1)

그 유명하단 워렌 버핏과의 점심도 함께 했다는 J는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런던 금융가에서 오랜동안 마구 일하다 어느날 돌연히 사직서를 내고 고향인 페루, 리마로 돌아가 기꺼이 한량이 되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셔틀버스 사업체를 꾸려 운영하지만 그의 진짜 열정은 집콕의 수시간의 피아노 연습과 독일어 배우기다. 바흐와 라흐마니노프가 그의 연습곡인 것처럼 J의 독학 독일어 실력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이미 훌륭한 수준이었다.

그는 매일 2시간을 독일어 배우기에 할애한다. 배운 단어 플래시 카드만 한바퀴 돌아도 1시간이랬다. 나는 그의 개인 독일어 스파링 상대였다. 그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계획하는 바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배운다. 그는 그저 그것이 즐겁다. 그는 최근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저, 그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A. (시리아, A0)

고백하지만 처음 A와 함께한 한동안의 시간은 부담스럽고 심지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시리아 국적의 수강생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2016년 무렵 당시 20명 남짓 규모의 이주자 독일어 여성반에서 A는 늘 열심을 넘어 극성이었다. 다른 이들의 기회를 가로채 아무때나 툭 끼어들어 말을 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동기와 자발적 의지 없이 무력한 수강생들을 다독여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수강생들과 최대한 함께 가야하는 강사의 입장에서는 곤란한 일이긴 마찬가지다. 그러길 3개월쯤 지났을까. 찬찬히, 하지만 언제나처럼의 열에 차오른 눈을 반짝이며 A가 내게 말해주었다.

"지금은 독일에서 태어난 둘째를 뱃속에 갖고 고향인 시리아를 떠났어요. 어린 첫째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수개월을 터키를 가로질러 걸었어요. 그리고 결국 독일에 도착했어요."

몇몇 접속사가 잘못 쓰였고, 관사의 성이 자주 뒤바뀌고 단어를 생각하느라 더디고, 주문장과 부문장 안의 동사의 위치가 뒤죽박죽이었지만 들어서 이해하기엔 충분한, 훌륭한 독일어였다. 말을 못하고 있는건 오히려 나였다. A를 안고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M. (수단, B2)

그는 어두웠다. 1:1 대화반을 시작한 그에게서 느낀 첫인상이었다.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치욕을 곱씹는 맹수에게서 뿜어나오는 서늘한 어두움이었다. M은 2년 반 전 망명 신청 후 독일 정부에서 제공하는 독일어 수업을 겸한 기술 인턴제를 마쳤지만 무슨 영문인지 지금은 한 물류창고에서 3교대 고된 노동을 하고 있었다.

첫시간부터 쉼표와 마침표를 무시한 그의 긴 성토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건재와 존엄을 증명해 보일 방법으로 그는 최대한 무조건 빨리, 최대한 고급 어휘를 동원해 말하려 애썼다. 때문에 문장은 자주 중간에 끊겨 원래 뜻이 무색하게 증발하고, 똑같은 패턴은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었다.

모든 독일인들은 다 비열한 사기꾼이고 자신이 더이상 기술을 배울수 없도록 모함해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는거다. 진실을 가리는 것은 내 소임이 아닌지라 나는 그저 묵묵히 듣는다. M은 자신이 여러 철학서적과 유명 자기계발서를 섭렵한 사람인데도 독일인들에게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는 파라노이아에 견줄 깊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빛나는 독일어는 그가 스스로를 증명해 보일 유일한 수단이자 무기였다. 그의 독일어가 유창해지더라도 그의 어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것 같았다.


L. (대한민국, A1)

남편의 직장 때문에 독일로 이주한, 두 명의 십대 자녀를 둔 주부 L은 독일어를 생각만해도 지긋지긋하고 몸이 아프다고 했다. 남편의 독일인 직장 동료와 함께한 자리가 끝나면 심지어 몇일을 마음앓이를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미 독일어가 제 2모국어가 된 자녀들을 이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고통의 원인은 하지만 독일어가 아니다. 독일어가 무슨 원수인것처럼 떠넘기지만 그녀의 모국어가 한국어이듯이 독일어는 누군가에게 모국어이기도, 또 누군가에게는 외국어이기도 하다. 대수롭지 않다.

단, L이 일컫는 것은 독일어가 자기 마음대로,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인과, 심지어 자녀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아름다운 동기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들이는 에너지와 시간이 상응해 쓰이지 않으면 이룰수 없는 일이다. 독일어를 배우는 이 원초적 고통은 실은 이 내면의 균형상실에서 온다.


독일어가 무슨 대수라고

독일어가 자신의 인생에 뛰어든 이상, 독일어를 배울 기회가 주어진 이상, 다른 이유를 막론하고 나는 무조건 첫번째 모듬에 속할 것을 주저없이 권한다. 사실상 주어진 당위로 독일어를 배운다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배우고 싶어한다는 것 뿐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써먹을 궁리는 나중에

과거 학창시절의 종용과 강제의 방식의 학습의 경험과 매너리즘에 스스로 젖어 있기 때문에 조건반사적으로 배움을 강요로 여기곤 한다. 배워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대체해 바꾸어, 거기 맞게 행동하면 될 일이다.

실은,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배움의 여정이 시작된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저 이 일을 기꺼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주어진 당위를 자발적 선택으로 바꿀수 있다. 마음이 하는 일이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적극적인 의미에서 누리는 자유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