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일어 때문에 파괴되었어요

파괴되고 나서의 자유

by 미라

아가미


아가미를 열 때마다 쭉쭉 안으로 밀려드는 자음과 모음들. 바닷물에 녹아들대로 녹아들어 이제는 거리낌 없이 익숙하게 물고기의 몸 속으로도 드나든다. 모국어의 바다에서 물고기들은 심지어 가끔 바다를 잊기도 한다. 당연하다는 듯 바다에 담겨서 바다가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이 마치 무한으로까지 수렴될 듯한 착각에 빠져 자신을 둘러싼 바다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이다. 그만큼 물고기들은 숨을 쉬듯 말을 하고, 단어와 문장 사이를 날렵하게 유영해왔다.



이제는 아가미가 타 들어 가도록 세차게 숨을 쉬어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있는 힘을 다 짜내 낯선 자음과 모음의 모양 대로 입을 연신 벌려보았자 타들어가는 몸을 시원하게 적셔줄 바다의 기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유영은 커녕, 황망함과 자조감에 뒤틀린 물고기의 몸들은 자기도 모르게 발작처럼 공중으로 튀어올랐다가 냅다 맨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이 낯선 언어의 바다에는 아직 물이 고이지 않았다.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이 물을 스스로 길어올러 채우는 일이다. 다시, 유영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이는 성인의 나이에 독일어를 외국어로 배우며 독일에서 유학-, 직장-, 사회 생활등을 동시에 헤쳐나가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를 두고 겪는 상황이다. 갑자기 물 밖으로 빠져나온 물고기의 형국. 특히 이 상황은 그동안 모국어를 청정하게 잘 가꾸어 쓰던 이들에겐 더 큰 도전이다. 더 나가 본인이 보통 이상의 지적감수성을 지니며 모국어 문화권의 문화적 엘레트 그룹에 속해있었다는 자의식이 있는 경우에, 독일어를 배우는 이 과정은 결락의 감성이 압도하는 자아해체의 고통이 될 수도 있다.



D. (이름. 익명 약자) (국적: 호주, 모국어: 영어, 처음 만났을 때의 독일어 레벨: 제2모국어 수준)


D.의 선조들은 14세기 러시아를 떠나 독일에 정착해 수 세대를 살다 호주로 이만했다. 독일식 이름을 가진 D.는 미국에서 이름있는 연극감독으로 활약중이다. 독일어를 잘 할 수 있다는 배경 때문에 독일에서 온 배우지망생들에게 즉흥연기 등의 지도와 각종 연극 관련 세미나를 독일어로 열어 돕는 일도 하고 있다. D.는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촌철살인의 간단명료한 언어로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효과적이고, 또한 미학적으로도 흥미롭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D.는 자신의 독일어가 모국어인 영어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간극을 극심한 스트레스로 느끼고 있었다. 1:1로 옮겨 말하려 할 때 적당한 독일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괴롭다는 것이다. 수강생들을 향해 "이제 긴장을 펴고 원래 상태로 편안히 서 계세요"라는 쉬운 독일어 표현도 떠오르지 않을때면 풋내기 배우지망생들 앞에서 경험있는 감독이 권위가 무너지는 듯해 마음이 매우 불편스럽다는 것이다.


미라 (D.에게)


영어와 독일어를 1:1로 치환해 멋드러지게 옮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일 뿐, 지금 당장 가능한 일이 아니고, 앞으로도 실은 가능하지 않을 일이에요. 모든 언어에 잠재된 언어 넘어의 것까지도 남김없이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차피 부질없는 기대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가진 독일어 실력이 10중에 지금 8이라면 그 8 안에서 최대한을 길어올려 말하면 되는겁니다.


8을 쥐고서 10을 그저 선망하는 마음에서 괴로움이 옵니다. 8을 10으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해 나가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꺼이 내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당신이 하는 독일어의 권위는 당신이 택한 단어들이 가진 지적인 객관적 무게가 아니라 당신이 그 말을 하는 내용의 진정성과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겁니다. 괴로운 마음에 허둥대다 8마저도 미치지 못하는 독일어를 해야 쓰겠나요.



A. (러시아, 러시아어, C1)


A.는 푸틴의 러시아에 실망해 가족 모두와 독일로 이민을 결심한 전직 이비인후과 전문의이자 개업의사였다. 현재 극심한 의사 및 의료진 부족을 겪고 있는 독일에서는 모든 대륙과 문화권을 막론하고 의사 및 의료진들에게 독일 이민 장벽을 낮추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이주자 출신 의료진들은 전공의 자격 시험과 높은 레벨을 요하는 의료전문종사자들을 위한 독일어 시험을 따로 치러야 한다. 이들 이주자 의료진들은 특히 일손이 매우 부족하고 의료 인프라가 낙후한 독일의 작은 소도시나 마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당사자인 이들 이주자 의료진들은 물론 독일의 환자들에게도 매우 낯선, 새로운 삶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자신의 화려한 경력 덕에 한 소도시의 종합병원 말단 전문의 일을 하게 된 A.는 나와 처음 만난 날 거의 울먹였다. 중년을 훌쩍 넘긴 거구의 남자의 나긋나긋한 독일어 말꼬리가 떨려 이겨지고 있었다. 나도 어쩐지 마음이 아파 코끝이 시려왔다. 그는 그날 그에게 일어났던 일이 던져준 수치심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환자인 십대 후반의 딸을 데리고 진료실에 들어온 어머니가 A.의 독일어 실력을 문제삼아 A.의 면전에서 항의하는 것에서 모자라 독일어가 모국어인 의사를 당장 데려오라며 고성으로 행패를 부린 것이다.


환자의 독일어가 그가 잘 이해할 수 없는 십대들 특유의 은어 투성이고 부정확하게 너무 빨라 A.는 당황한 나머지 방어적인 심리상태가 되어 불안한 마음으로 환자에게 재차 되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화를 불렀다. 프랑스어를 이미 모국어 수준으로 하는 A.가 가장 높은 레벨까지 독일어를 배웠지만 현실에서 부딪힌 예상치 못한 장벽이었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동료 의사는 결국 올 수 없었다. 이미 모든 의사가 다 이주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미라 (A.에게)


당신도, 그 어머니도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겠군요. 그게 어디 당신의 독일어 실력에서만 연유한 일이었겠나요. 당신의 독일어는 이미 충분히 훌륭합니다.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사는 게 당분간 힘든 십대들의 은어를 독일에서 자라 독일어가 모국어인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이라서 다 잘 할 수 있고, 때문에 흠없이 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신을 결국 힘들게 한거에요.


당신이 의사고 환자의 증상을 이해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인 이상 당신이 끈기있게 되물었던 건 정당한 일인겁니다. 하지만 그때 당신의 마음이 어땠나요. 당신에게 '상처와 충격을 준'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느냐는 사실 이 일의 중심이 아니에요. 자신의 마음을 보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보세요.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을지, 바람 없는 촛불처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도 스스로에게 이로운 방법입니다.


언젠가는 독일 사회가 당신 같은 이주자들에게 이 사회의 내적 성장을 이유로 고마워해야 하는 날이 올겁니다. 거대한 성장통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독일 사회는 당신 덕분에 이 땅에 주로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다양성의 가치를 몸소 배우고 있어요. 그러니, 모르면 오히려 물어보세요. 이해를 구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세요.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하는 방법인 거에요. 그게 의사인 당신의 자존감을 세우는 가장 첫 일이 되어야 하잖아요.



C. (콜롬비아, 스페인어, B2)


독일에 지사를 둔 한 국제적 명성의 IT 회사에서 데이터분석가로 일하고 있는 C.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나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문제를 토로했다. 일자리에서 아무도 자신이 하는 독일어를 한방에 알아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분명히 문법적으로 올바를 독일어를 구사했다고 믿는데 상대방은 그때마다 미심쩍은 얼굴로 재차 되묻거나 심지어 자신에게 짜증을 내며 되묻는다는 것이다. C.도 그것이 짜증스럽다고 했다. 이제 누군가와 짧은 독일어 한 문장을 하는 것도 노이로제가 올 지경이고 이런 천편일률적인 반응에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녀는 상심해했다.


C.가 여기까지 말하는 동안 나는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지만 그녀가 가진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 역시 몇 차례에 걸쳐서 C.의 독일어를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어야 했다. C.는 자신의 독일어의 부족한 점을 속도로 만회하려고만 애쓰고 있었다. 관사나 형용사 어미 변화같은 확신 없는 문법이나 잘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의 간극을 빛의 속도로 뛰어 넘으면서 전체적인 대충의 뜻만을 전달하는데 그치지만 속도만큼은 모국어 독일어 사용자들의 평균 속도를 뺨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는 원래 모국어인 스페인어도 빨리 하는 편이라 둘러대면서.


미라 (C.에게)


말의 속도는 말이 전달하려는 본질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말의 본질을 택하는 대신에 속도를 택해 스스로는 물론 당신의 대화상대자들에게 눈가림을 하고 있는 것 뿐이에요. 자신감이 없을 밖에요. 탄로날 것이라는 두려움은 이미 당신이 말하는 순간에 진실로 태어나 당신의 삶 속에서 현실로 생성되고 있어요. 당신이 가진 두려움은 당신의 대화상대자들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전달 됩니다. 그게 어쩌면 그들도 모르게 당신에게 보이는 반응들인 거에요.


어떤 언어건 인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여과없이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던 인간들의 말 됨됨이를 떠올려보세요. 그들이 어떤 속도로 말하던가요. 실제로 말의 속도가 중요하다면, 사실 당신은 더 잘 이해받기 위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천천히 말해야 해요. 당신이 하고자 하는 말의 본질로 돌아가야 해요. 당신이 빠르게 건너 뛰려고만 했던 구멍을 천천히 메꾸는 일을 먼저 해야하는 겁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에요. 앎을 가꿔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안이 있을 수 없어요.



파괴되라, 자유하라


성인이 다 되어 말을 배우는 일이 녹록치 않고, 심지어 독일어를 배우는 일이 자신의 자존감과 자의식을 위협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때면 이를 만회하거나 부정하려고 괴롭거나 쓸쓸해 지는 대신, 이 때를 소중한 기회로 삼아 기꺼이 파괴되라고 권하고 싶다. 한 때 먼 과거의 나 스스로도 한동안 독일어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그 때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실제로 생각한다. 결국엔 독일어가 아니라 알량한 자존심에 내 스스로 낸 상처가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일만큼 한 성인의 인간에게 자아 파괴의 자유와 재미를 주는 일도 드물다. 손 안에 떨궈진 꽃 한 송이를 타인이 짓밟았던, 자기 스스로 짓이겼던 가끔 독일어를 배우며 생기는 삶 속의 도전들은 이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 환상의 꽃을 환상으로 직시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내가 나라고 여겨 나에게 부과한 모든 질적인 정의가 사실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사실을 인정하는 출발점이 되어줄 수도 있다.


외국어를 배우는 일이 다시 숨쉬고, 다시 유영할 바다를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즐거울 수 있다. 배우는 만큼 당신이 쏜살처럼 헤엄쳐 나갈 수 있는 바다가 점점 넓어지는 일이니 말이다. 획득하여 누리는 것, 그것이 자유다. 실제로 갓난아기가 태어나 하는 가장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하는 일은 모국어를 배우는 그 모든 유희로 가득한 일들이다. 모국어를 배우며 자존심 상해 하는, 당황하고 풀죽은 갓난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