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에 늦깎이 입문하며

by 대륙의 변방

흔히 고전을 읽는 일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대개 '다시'를 붙인다고 한다. 즉, ooo를 다시 읽었노라고 한다는 것. 나는 그 유명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이번에 '다시' 아니고 처음 읽게 되었다. 작가의 여섯 작품중 유독 잘 알려진 '오만과 편견'을 읽은 사람에 비로소 나도 끼게 된 것이다.


그 전부터도 참 많이 눈에 띄었었는데 최근 유난히 더 많이 그랬던 이유가 작년이 작가의 탄생 250주년이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행사 소식도 내 관심을 끌었었다. 영화 '유브 갓 메일'에는 '오만과 편견' 덕후가 나온다. 그 책을 200번은 읽었다면서 매번 엘리자베스와 다시가 결국 어떻게 엮어질 것인지 설레며 읽게 된다고 온라인에서 알게되어 대화 상대가 된 남자에게 열렬히 권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rewrite' 라는 영화속에도 제인 오스틴이 언급된다. 데뷔작은 히트를 쳤으나 이렇다할 후속작이 없어 업계에서 관심밖으로 밀려난 시나리오 작가가 우연히 시나리오 작법 과목 강사로 가게 된 대학에서 제인 오스틴을 전공한 학장과 부딪히는 장면. 결국 제인 오스틴 소설의 작품 세계란 무도회 따위에 호들갑떠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냐고 발언해 당시 19세기 여성의 삶에 천착해 있던 학자의 심기를 건드리고 대립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실제 제인 오스틴을 읽음으로써 인생이 바뀌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루스 윌슨이라는 여성은 예순살 생일에 문득 평탄해 보이는 자신의 인생이 낯설게 느껴지더니 일흔살에 졸혼을 선언한 뒤 제인 오스틴 '다시' 읽기를 결심하고, 여든 여덟에 시드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아흔살 때 '제인 오스틴 치료'라는 책을 썼다. 작년 12월 '제인 오스틴을 처방해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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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의 한국어 번역본이 40종이 넘는다고 하니 200년 여 동안 이어져 온 인기가 대단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제서야 읽은 나도 조목조목 늘어놓을 수 없지만 뭔가 매료되는 바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미모가 빼어난 베넷 가문의 장녀 제인이 재력도 빵빵하고 지위도 있는 남자로부터 마음고생끝에 청혼을 받게 되는 것이나, 재기발랄하고 자기 주장이 당찬, 그리고 성숙한(나는 그렇게 느꼈다) 둘째 딸 엘리자베스의 다시(Darcy)와의 오해끝에 천생연분같은 로맨스의 결실을 맺는 것도 재미를 주지만, 나는 주변적 인물인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롯에게 눈길이 갔다.


하루 사이에 친구간인 두 여성에게 청혼한 콜린이 첫번째 거절당하고 바로 두번째 시도의 대상으로 삼은 이가 샬롯이다. 샬롯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 승낙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로맨틱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다만 안락한 가정을 원한다고. 그닥 예쁘지 않은데다 스물일곱살에 부모에게 얹혀살면서 슬슬 부모에게 부담이 되고 있는 처지에 결혼을 통해 안전한 독립이 가능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설명하며 가치평가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 대목을 영화에서는 '누구에게나 로맨틱할 수 있는 사치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뉘앙스로 말하는데 꽤나 공감되고 설득력있었다.


어찌보면 '결혼을 위한 결혼'일 수 있지만 인간적으로 공감이 되었다. 요즘식의 폄하하는 말로 하면 '취집'이 되는 셈인데, 샬롯이 실제 자신의 관리하에 가정을 꾸려가는 재미에 대해서 엘리자베스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샬롯이 이렇다 할 로맨스 없이 가정을 꾸렸대서 불행하게 보이진 않는다. 그런 결혼이 추구되어서 안될 이유가 있나 싶다. 오히려 기대와 환상이 없는채 미지근하고 밍밍한 감정을 토대로 더불어 잔잔하게 일구어가는 삶을 비웃거나 조롱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한눈에 반한뒤 타오르는 열렬한 로맨스가 부러움을 사며 각광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 인류가 지속해온 남녀간 결합이 꼭 그런것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구조적으로 제도나 문화, 관습 등의 이유뿐아니라 개개인들의 성향과 조건 등 여러 이유들로 인해서.


어쨌건 나는 겨우 제인 오스틴에 늦깎이 입문하여 첫 발을 떼었다. 앞으로 그로인해 인생이 바

뀌는 일이나 그의 작품들을 처방전 삼아 여러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인물들로부터 적잖이 재미도 선사받고 또 위로를 받을 수는 있을 것 같다. 특히 키크고 잘 생긴데다 부자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거는 재주가 없는 결점을 지닌 동시에 스스로 그것을 담백하게 인지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우리의 다시(Darcy)! 그를 가끔은 다시 만나고 싶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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