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n-in sign-out하는 이유
캐나다를 비롯해 서구권에서는 손글씨로 싸인(signature)를 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문화권에서는 도장을 사용해왔다. 싸인이든 도장이든 언제나 상당히 효력을 가지므로 절대 함부로 할 일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아무나 도장파는 집에 가서 의뢰하면 똑같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막도장이라는게 있고 진위성을 중요시하는 곳에 사용하는 인감도장이라는게 있다. 부부사이에서 서로에게 이혼을 제안(?) 또는 협박할 때 '도장 찍어'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을 정도로 도장은 그 개인을 상징하는 사물로써 기능해왔다. 아무튼 싸인이든 도장이든 그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존재성을 나타낸다.
캐나다는 싸인 참 많이 하는 나라다. 애들 학교에만 보내놔도 신학년이 시작되면 싸인 할 일 참 많다. 현장학습을 보내겠다고도 싸인하고, 현장학습 갈때 스쿨버스 태워도 좋다고도 싸인하고, 체육시간에 스포츠 활동 시켜도 된다고 싸인하고 점심을 학교안에서 먹게하겠다고 싸인하고 예방접종을 받겠다는 싸인도 해야 하고 학교활동시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에 동의하는 싸인도 해야한다. 개인과 개인의 계약사항에만 싸인을 하는게 아니라 내가 어떤 사항에 대해 동의하는지 여부에 관한 싸인에서부터 어떤 내용의 안내를 받았음을 확인하는 싸인에까지 참 세세하기도 하다.
어떤 건물이나 장소를 출입할때도 방명록이 있어서 sign-in/ sign-out을 하게 돼 있는데 나는 내멋대로 선택사항으로 여겨왔었다. 들어가면서 sign-in하고 나올 때 sign-out하는 이유를 알았을 때 내겐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권위주의 국가 출신인 나는, 특히 관공서나 공공기관 같은곳에 sign-in/out하는 이유를 '언 놈이냐 무슨 일로 감히 여기 들낙 거리는게냐' 쯤으로 알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그 이유인즉슨, 그 건물에 불이 나거나 구조할 일이 생기면 소방관이 sign in 되어있는 사람들을 찾아 구조하는데, 건물에 들어가 있고도 sign-in 되어있지 않으면 나를 찾지도 않는다는 뜻이고, 들어왔다가 볼일 마치고 나가면서 sign-out을 하지 않으면 소방관이 있지도 않은 사람을 찾느라 쓸데없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된다는 이유였다. 얼핏 들어보면 별 얘기 아닌듯 하지만 나에겐 전혀 뜻밖의 이유였다. 불이 났다하면 각자가 죽기살기로 기를 쓰고 탈출하면 모진 목숨 하나 건지는거고 아니면 허망하게 죽는것일뿐, 어떤 구조 시스템에 의해 누군가 나를 구조하도록 되어있다는 믿음을 내가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참 놀라웠다.
'만일'을 염두에 두고 대책을 설계하는 '저들식' 과 '설마'를 앞세워 대범한 '우리식'.
그 이후로는 방명록에 이름 적으면서 어쩐지 주눅드는 기분으로 '이런 건 왜하나' 또는 '아무려면 어때'하는 형식적인 sign in이 아니라, '나예요. 나. 나 여기 있으니 만일의 경우 날 꼭 좀 찾아 구해줘요 네?' 하는 진지한 마음으로 적게 되었다.
합리나 실리와는 거리가 먼 '우리식'의 대범해서 생기는 오류는 물론이고 자꾸 반복되는 사고에도 학습하지 못하는, 아니 안하는 안이함을 접하면 더욱 답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