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는 줄 알았더니, 다들 도망 중이었다
수영은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이 서는 순서가 중요한 운동이다. 앞뒤 사람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속도가 너무 빨라 앞사람 발 터치를 하면 안 되고, 너무 느려 뒷사람이 멈춰 서게 해서도 안 된다. 속도가 매너를 만든다. 수영장 에티켓의 기본은 ‘알맞은 속도'이다. 말은 쉽지.
오늘은 접영, 배영, 평영, 자유형. 일명 ‘접배평자’를 한 번에 이어서 했다. 지난 강습에서 갑자기 턴 연습을 그렇게 시키시더니, 강사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접배평자 쉬지 않고 두 바퀴. 한 바퀴도 아니고 두 바퀴라니. 갑자기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간다. 워워, 힘 빼자.
“우리 힘들지 않게 천천히 해요.” 고개를 끄덕이며 수영을 시작했다. 내 뒤에는 두 명의 회원님이 있었다. 그런데 접영 두 팔을 힘겹게 뻗고 있을 즈음,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오리발 뒤로 다음 순서 회원님의 머리가 거의 닿을 듯 붙어 있었다.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물속인데, 뒤에서 ‘간다 간다 비켜 비켜’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경찰한테 쫓기는 도둑이 된 기분이었다. 잡히면 끝장이다, 얼른 도망가자. 마지막 자유형을 할 때는 숨 쉬는 것도 사치였다. 배우지도 않은 무호흡 자유형이 이거였군요.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헉헉. 워치에 찍힌 심박수는 160. 지금 생각해도 숨이 찬다.
얼굴이 벌게진 사람들의 고백이 끝말잇기처럼 이어진다. 앞사람이 뒷사람에게, 다시 그 뒷사람에게 연결.
"회원님, 저 엄청 따라오시더라고요. 저 오늘 진짜 미친 듯이 수영했어요."
“제가요? 저는 뒤 회원님이 쫓아와서 엄청 도망간건데.”
“제가요? 저는 뒤 회원님이...”
옳다구나. 아무도 뒤에 없는 것이 맘 편하겠어.
“다음엔 제가 맨 뒤에 설래요.”
그 말에 이어지는 오늘 맨 뒤였던 회원님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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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번 님한테 쫓기고 있었어요.”
"(1번님) 제가요?"
순간 모두 빵 터졌다. 쫓는 사람은 없고, 쫓기는 사람만 있다. 지금 이곳은 수영장이 아니라 거의 미스터리 스릴러의 현장.
사실 누구도 속도를 빠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누굴 쫓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다들 자기가 쫓긴다고 생각했다. 완전 공포의 무한 추격전. 왜일까? 우리 수영장 회원님들은 다들 도망자 유전자를 갖고 있는 걸까?
다들 제 페이스보다 속도를 올려 수영한 이유는 비슷했다. 내가 느려서 뒷사람이 멈추게 되면 민폐일까 봐. 그리고 내 뒤에 바짝 붙은 사람을 보며 ‘저 사람보다 느리면 안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속도는 단순한 페이스가 아니라 실력처럼 여겨지고, 스스로가 뒤처질까 불안했다. 자기 수영을 한 게 아니라, 마음속 시합을 펼친 셈이다.
그런데 나보다 빨라 보였던 그 사람은 나를 앞설 생각은 없었다. 결국 누구도 누굴 쫓은 게 아니었다. 다들 자기 머릿속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을 뿐. 자기 속도보다 남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각자 자기 시야에 갇혀서, 서로 눈치 보며 전력질주. 앞사람을 쫓는 줄 알았더니, 뒷사람으로부터 도망 중이었다.
인생도 비슷하다. 내 속도로 가면 되는 건데 그게 어렵다. 괜히 조급하고, 괜히 미안하고, 괜히 헉헉대고. 그러다 심장이 터질 듯 지친다. 다른 사람의 속도가 아니라, 나의 페이스를 찾는 게 먼저다. 어차피 아무도 나를 추월하려고 안 하는데, 나 혼자 전력질주하지 말자. 속도보다 숨이 먼저다. 숨찬 건 수영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