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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Mar 17. 2020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28

아아 사랑하던 나의 님이 왔습니다

그가 온다.


신난다.


내 친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내 남자 친구가 왔는지를 궁금해했다. 그중에 하나는 지금까지 안 오는 건 안 온다는 거라며 기대를 접으라고 했다. 알 수 없는 사정으로 며칠 전 파혼한 친구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왠지 정말 안 올 것만 같아서 펑펑 울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가 오는 날이다.


버선발로 뛰어나가지는 못하지만 공항에 마중 나가기로 한다.


2월 말이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격히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며칠 전이다.

인천 공항은 현재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위험한 곳이라 했다. 마스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던 민익씨를 며칠 동안 달달 볶아 아마존에서 마스크 한 박스를 사 오도록 했다. 공항에서 나오기까지 무조건 착용하라고 신신당부도 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쏜살같이 공항을 빠져나와야 한다.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재회 작전을 시작하며 비장하게 마스크를 쓴다. 뽀뽀하긴 글렀다.


오늘따라 공항에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특히 민익씨가 나오는 미국-한국 출구인 터미널 2에는 약 100여 명 정도 되는 소녀들이 있다.


‘오늘 누가 오나?’


민익씨가 오는 게 소문이 났나 보다. 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했다.


얼마 간 기다리다 보니 후드를 뒤집어쓴 정체모를 무리가 출구에서 연이어 나온다.


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ㄲㄲㄲㄱ!!!!


소녀팬들은 함성과 함께 우르르르 공항 밖까지 그들을 쫓아나갔다가 다음 멤버를 찾아 다시 우르르르 들어왔다가 다시 쫓아나가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배우 이서진 씨가 중간에 나왔는데 나만 알아본 것 같다. 선글라스 뒤로 소녀팬들의 함성에 당황하는 눈빛이 보인다. 세월이 무상하다고 느끼진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내가 걱정 안 해줘도 이서진 씨도 충분히 잘났고 잘 먹고 잘 산다.


근처에 있던 한 남자가 본인의 어머니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말한다.


“방탄소년단이래.”


와우.


미국에서도 텐트 치고 기다리야 겨우 콘서트 장에 들어갈 수 있는 유명인사를 공항에서 다 보다니 신기하다. 다만 나는 방탄소년단보다 민익씨가 더 좋다. (어우 닭살)


방탄소년단의 팬 무리가 모두 지나가고 공항이 텅텅 비어갈 때까지 민익씨는 나올 생각이 없다.

아침에 비행기 타러 간다고 전화를 받은 것이 마지막 통화였는데 도착한 지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으니 슬슬 별 생각이 다 든다.


공항에 제시간에 못 갔나?’

‘짐을 잃어버렸나??’

‘출구를 못 찾고 있나???’


민익씨는 첫날부터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거북이 남친의 귀환이다.


역시나 하며 냉소적인 미소를 마스크 뒤에 머금고 있던 순간, 큰 눈의 익숙한 외국 남자가 보인다.


방탄소년단 팬들의 함성만큼 격하게 그에게 달려간다.

영화에 보던 것처럼 뛰어들어 안기고 싶지만 그러다간 그가 뒤로 넘어져 병원에 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인생 가장 드라마틱하게 그에게 안겼다.

내가 약 1년 동안 상상해 온 그 모습이다. 문제는 뛰어들어가면 안 되는 정도로 깊게 들어갔다. 공항 경찰이 있었다면 나를 무단으로 비행기 타려는 사람으로 오해해 전기총 같은 것을 쐈을지도 모른다. 민망해서 그의 트렁크를 들어주는 척을 하며 당당하게 걸어 나온다.


민익씨는 모든 상황이 너무 웃기는지 빵 터졌다.

웃으며 자꾸 마스크를 벗으려고 하는데 내가 도로 씌운다.


“지금 한국 공항은 너무 위험해.”


그가 한국에 오자마자 자가격리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 둘 다 건강해야 얼마 간 꽁냥 거릴 수가 있다. 감격스런 마음에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기쁨을 잠시 만끽하던 중 민익씨를 기다리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음을 깨달았다.

민익씨가 취직할 영어 학원에서 공항으로 픽업 택시를 보낸다고 했다. 영어로 도미닉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한 시간 반을 기다린 고마운 분이다.


민익씨가 가서 그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아, 아가씨가 뛰어가서 둘이 가는 줄 알았네.”


민망하다.


“워, 워낙 오랜만에 봐 가지고요. 하하!!”


옆에 사람들이 킥킥 웃는다.

부끄럽다.

그치만 괜찮다.

인생에 길이 남을 민망하고 즐거운 기억을 만들었다.


내가 돕겠다며 끌고 가던 이민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굴러간다. 민익씨와 기사님이 점점 멀어져 간다. 다급하게 민익씨에게 구조의 눈길을 보낸다.


“이거랑 바꿀까?”


다정하게 그가 말을 건넨다.


!”


가상현실 속의 남자 친구가 현실로 다가 온 느낌이다.


든든하다.


아,

행복하다.





심장에서 잠시 잃어버린 느낌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요.
어쨌든 좋았더랬습니다. 머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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