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처음으로 맞는 민익씨의 생일
민익씨의 코워커들은 다들 각자 독특한 구석이 있다.
#1 니키
니키(가명)는 몽골에서 시애틀로 이민을 간 아가씨인데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평소 K-Pop이나 한국 드라마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몽골에서도 한국이 유명한가 보다. 니키는 꿈이 많은데 배우가 되고 싶다고도 했고, 정치나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이 많으며 강력한 페미니스트다. 나도 여성의 인권을 중요하게 여겨서 민익씨와 가끔 설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니키는 나보다 수백수천 배 강력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평소에는 활발하고 명랑하고 모험과 도전을 좋아하는데 누군가가 자신이 응당 알아야 할 지식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거나, 심리적으로 공격을 받았다고 느끼면 엄청나게 공격력이 상승하며 으르렁거리는 경향이 있다. 한 번은 니키의 동료인 제시카와 말싸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니키가 무언가를 모르는 것을 제시카가 이상하게 생각하자 니키가 열 받아서 마구 화를 내며 홀로 뛰쳐나간 적이 있다. 나는 먼발치에서 지켜보다 무서워서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다.
#2 제시카
니키와 그 후에도 삐그덕 거리며 친구 관계를 꾸준히 이어가는 제시카는 방탄소년단의 엄청난 팬이다. 방탄소년단 콘서트에도 자주 갔고, 이태원 클라쓰의 스토리를 나에게 알려줄 정도다. 웬만한 한국어의 리스닝이 가능하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교육에 관심이 많은 참 교사다. 미국에서 이혼 가정이 아닌 집에서 자란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나도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대부분은 이혼 가정에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제시카는 부모님이 30년간 함께 하고 계신단다. 동생은 서커스단에서 일하는데 라스베이거스에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단'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을 보여줬는데 동생의 외모가 출중하다.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언니의 모습이 흐뭇해 보인다. 한국인 남자와 썸을 타는 중인데 그 남자가 제시카를 헷갈리게 하는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자 친구처럼 스킨십은 하는데 관계 정의를 하지 않는 상태인 듯하다. 속에서 천불이 나고 '그런 사람은 그만 만나 제시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시카는 그 남자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제시카는 민익씨와 동갑이다.
배시시 웃는 그녀가 한없이 사랑스럽다.
나도 그렇게 애매하게 구는 인간들 사이에서 온갖 고민과 방황의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끌려다니다 결국 내가 모두 그만하자고 이별을 고하긴 했지만, 집에 가는 길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며 비운의 여주인공 마냥 눈물을 뚝뚝 흘리며 터덜터덜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We accept the love we think we deserve
우리는 스스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만큼의 사랑을 허락하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2탄, the Perk of Being a Wallflower(한국어 제목: 월플라워)에 나오는 명대사다. 남자 주인공 찰리가 짝사랑하는 여학생 사만다가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는 이상한 놈들만 골라 만나고 다니자 자신이 따르고 좋아하는 학교 선생님에게 왜 사람들은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만나냐고 물어봤을 때 선생님이 말한 답변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민익씨가 그런 사람들에게는 선을 그어줘야 한다면서 난리다.
나는 씩 웃으며
연애 조언은 아무리 해줘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나도 그렇다.
제시카는 내가 너무 좋단다.
팬을 획득했다.
#3 마이크
마이크는 미국 오하이오 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4~5년 정도 일하다 한국에 왔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에 가고 싶었는데 경쟁이 덜한 한국에 왔다. 다음 목적지는 상하이라고 한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데, 세계를 유랑하며 즐겁게 산다. 미국에 태어난 것도 복이다. 노후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면 세계적인 꼰대가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역사에 관심이 많고, 자신이 가르치는 분야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학생을 가르치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말해줬는데, 남학생 하나가 말을 너무 듣지 않고 반항을 하는 바람에 책상을 세게 내려친 적이 있다고 한다. 워낙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라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나중에 알고 보니 손에 금이 갔단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는데 티를 낼 수가 없어서 그대로 교무실로 쫓아냈고, 학생의 부모님을 모두 소환해 삼자대면을 했다. 알고 보니 부모님은 일하느라 자식을 보살필 수 없었고, 가정에 불화와 문제가 많았단다. 학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한 일이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는 좋은 선생님이다. 그리고 그는 무척이나 외롭다. 늘 데이팅 앱 '틴더'를 이용하는데, 하루는 어떤 여성을 만났다며 우리에게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많은 직장동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한참 후에 나타났다.
둘은 딱히 말을 많이 나누지 않았다.
마이크가 소극적이다.
여자 앞에서 소심해져서 말을 잘 못한다고 했다.
한국인 여자분은 나에게 말을 건다.
민익씨에게 연신 잘생겼다며 칭찬을 한다. 마이크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나는 기분이 나쁠 것도 없이 마이크의 눈치만 보느라 바쁘다.
여자분은 그 후에도 나에게 한 동안 호구조사를 하셨고, 근처에 있던 다른 외국인과 껴안고 사진도 찍고 난리를 치다 햄버거 세트를 하나 시켜 다 먹고 택시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갔다. 나와 비슷한 동네에 산다며 같이 가자는 걸 나는 괜찮다고 했다.
휴... 그 날은 다시 생각해도 민망함이 밀려온다.
#4 찰리
찰리는 캐나다 사람이다. 귀엽고 쾌활하다. 웃으면 도날드덕같이 생겼다. 말을 하다 보니 나와 이야기가 잘 통한다. 민익씨가 다른 사람들과 노느라 정신이 팔려서 심심할 때 난 찰리에게 말을 건다. 찰리도 외롭다. 그도 마이크와 같은 데이팅 앱을 이용하는데, 나는 가끔 그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데이트 코칭을 해준다. 한국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알려준다. 한 번은 대전인지 부산인지에 사는 여자분과 이야기를 하다 마음이 통해 KTX를 타고 거기까지 다녀왔단다. 대단한 20대 초반의 열정이다. 여행과 경험을 좋아하는 찰리는 자신감이 다소 부족하지만 인간적이고 소탈한 면이 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내 나라가 아니면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 든다. 독립성의 아이콘이었던 나도 미국에서 많이 외로웠다. 끊임없이 함께 있어줄 누군가를 찾았다. 민익씨는 내 곁에 있어주었고, 다시 내 근처로 와 주었다.
민익씨의 생일이 다가와 그가 아끼는 동료들을 불러 생일파티를 열어주기로 했다.
민익씨의 폰을 뺏어 카톡을 보낸다.
다들 안녕, 나 젠이야. 오늘 민익씨 생일인데 다들 저녁 같이 먹을래?
동료들은 민익씨를 매우 좋아한다. 민익씨는 사람들이 안 좋아할 이유가 없다. 과묵한 편이고, 어디서도 잘 나서지 않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사람들의 성질을 긁을만한 일은 아예 안 한다. 동화가 잘 되는 스타일이랄까.
반면에 나는 무리에 있으면 괜히 혼자 겉도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민익씨도 자기가 사회성이 부족하다며 자신 없어할 때가 있다.
아무튼 민익씨가 좋아하는 동료들이 민익씨를 좋아해서 다행이다.
그들을 불러 민익씨가 좋아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케이크도 사고, 고깔모자도 사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동료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민익씨가 즐거워 보인다.
"불러줘서 고마워."
"와줘서 고마워."
직장동료들과 인사를 하고 민익씨에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너랑 평생 같이 있게 해 달라고 빌었어."
이 남자는 미워할 수가 없다.
너무 잘해주면 안 된다는 거,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거도 알고 있는데. 저러는데 어떻게 안 잘해 주나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