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직장 동료들을 만나다
민익씨가 한국에 와서 학원에서 수업을 시작한 지 2주 차가 되던 날,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미국에서는 사귄 지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직장동료를 만났는데, 한국에서는 2주 만에 만나다니 신기하다. 아마도 민익씨의 직장동료들이 미국에 있던 직장동료들에 비해 나이 대도 비슷하고 성격이 잘 통해서 일 마치고 회식도 자주 하고 친구처럼 지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래. 근데 벌써부터 긴장되네."
"긴장할 거 하나도 없어. 그냥 편하게 와."
말은 편하게 간다 했지만 금요일에 나름 한껏 꾸미고 그의 동료들을 만나러 간다.
장거리를 할 때는 굳이 열심히 꾸미지 않았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쇼핑도 거의 안 했다. 사업 준비한답시고 수입이 충분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굳이 꾸밀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남자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옷을 차려입는다는 이론에 공감하지 못하며 '옷 입는 건 자기만족이야' 외치던 나와는 모순된다.
조금 더 젊었다면 롱 패딩을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렇게까진 할 수 없다.
두껍디 두꺼운 패딩을 입었는데도 발목으로 들이치는 찬 바람이 어색하다. 사랑을 하면 용감해진다는데,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동료들과의 회식은 생각보다 조촐하다. 나름 규모가 큰 학원이라 한국인과 미국인이 뒤섞인 나름 거대한 회식인 줄 알았는데,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만 옹기종기 모여있다.
동료들의 이름은 니키, 케빈, 마이크다. (동료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할게요.)
니키는 동양인 아가씨인데, 송도의 영어학원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제시카를 데려왔다. 제시카도 한국인처럼 보인다. 둘은 시애틀에 있는 대학에서 만난 사이라고 한다.
니키는 민익씨와 같은 날 한국에 도착해 옆 방에서 묵고 있는 아가씨다.
활발하고 쾌활한 성격으로 민익씨와 벌써 제법 친해 보인다. 니키가 음식도 나눠주고, 종종 저녁도 함께 먹고 하는 듯하다. 딱히 질투가 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장거리 연애를 하는 동안 미국에 있을 때 그의 작은 행동들에 질투를 하던 것을 많이 후회했다. 그를 좀 더 믿어줄걸 하는 생각을 꾸준히 했다. 이제는 그러기로 했다.
한참 어려 보이는 니키의 친구 제시카가 처음 입을 연다.
아, 연상녀인 내가 괜히 혼자 찔리는 거의 유일한 질문이 아닌가 싶다.
그녀는 교포인데, 한국말은 거의 못한다고 한다. 사실 존댓말을 할 것도 아닌데 왜 나이를 물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할 말이 없거나 궁금해서 물어본 것 같다.
민익씨가 먼저 답한다.
... 그냥 스물다섯이라고 하면 될 텐데, 왜 저렇게 나이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의식한다고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그가 의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나이에 관한 직접적인 질문을 받은 적은 처음이다. 미국에서는 닉의 동생인 레즐리가 나에게 따로 물어본 적을 빼고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나도 개인적으로 남들의 나이를 궁금해하지 않는 편이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당황한 것 같다.
내 차례다.
담담하게 답한다.
마음은 아직도 이십 대 창창인데, 나이 먹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아직도 조금은 어렵다.
제시카가 화들짝 놀란다.
저런 호들갑적인 칭찬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온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화장실에 가고 싶기도 해서 화장실에 갔다.
돌아오니 니키가 다시 소리를 지른다.
... 집에 가고 싶다. 자기네는 영원히 젊을 줄 아나 삐딱하게 생각이 들다가도, 생각해보면 나도 예전엔 그랬다.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애써 웃으며 대답한다.
그때 니키가 크게 외친다.
교포와 친구고 아시안이라 단정 지었는데, 내가 평소 생각하던 몽골 사람의 느낌이 아니어서 당황했다. 그냥 '아, 그렇구나.' 했어야 하는데 말실수를 했다.
"아, 네가 몽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 한국인인 줄 알았어. 미안해."
그녀 또한 '그래? 알겠어.' 하면 괜찮았을 텐데 그녀가 말한다.
나는 머릿속에 할 대답이 떨어졌다. 회로가 꼬였다.
아차.
그 말은 그녀가 멋지게 생기지 않았다는 말과도 동일하지 않나.
제시카는 나이로 의도하지 않은 한 방을 먹였고 나는 니키에게 외모로 의도하지 않은 한 방을 먹였다.
그저 내가 나이로 자격지심을 느끼는 거였구나 현타가 온다.
"아... 미안해. 그런 뜻이 아니었어."
이거 말고는 할 말도 없다.
니키는 착한 사람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나중에 자리를 옮겼을 때 그녀는 다른 직장 동료들이 모두 있는 앞에서 내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야기를 주구장창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의도적이든 아니든 정신적인 피해를 입을 것 같다고 느낄 때 되내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속 명대사가 있다. 'Silverlining Playbook'이라는 영화에서 등장인물 패트릭이 잘난 척하고 자기를 깔아뭉개는 친형에게 하는 대사다.
I've got nothing but love for you, brother.
(나는 그래도 형을 사랑해.)
내가 그녀를 몽골인 같지 않다고 했고, 몽골인들은 다 멋지고 예쁘다고 했기 때문에 돌아오는 감정의 화살이다. 게다가 그녀는 갓 대학을 졸업한 스물셋, 혹은 넷이다. 그때의 나였어도 저런 분노를 느꼈을지 모른다.
니키를 더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 마이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이크는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한국에 왔단다.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난 사실 일본에 가고 싶었는데, 일본은 절차가 너무 까다로웠어. 경쟁률도 너무 세고. 그래서 한국을 택했어. 그런데 지금은 일본보다도 한국이 좋아."
케빈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일본보다는 한국이 영어에 대한 수요도 많고, 조금은 절차가 수월하다고 한다. 일본이 좋지만 못 가서 2차 선택이 된 건 조금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막상 와보니 한국이 너무 좋다고 하니 그건 또 자랑스럽다. 24시간 동안 간판의 불이 꺼지지 않고 신나게 놀 수 있는 나라는 아마 한국이 거의 유일할 거라고 자부해본다. 다들 여행과 경험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공감대 형성이 쉽고, 좀 더 친밀하게 친구처럼 지내기가 쉬운 것 같다. 이는 민익씨가 적응하기 좋은 환경을 뜻하기도 한다. 다행이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만나 대화도 하고,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들 좋은 사람들 같다.
다만 니키는 나에게 그 후에도 몇 번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많이 당했단다. 지금은 꽤 친해졌지만 당시에는 안타까웠다. 감정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 와중에 갑자기 민익씨가
하며 농담 식으로 이야기를 던진다.
감동이다.
그가 나를 지켜줬다는 감동이라기보다는,
이런 여자들의 미묘한 신경전을 그가 눈치챘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시켰다.
자나 깨나 말조심을 가슴에 아로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