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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Feb 20. 2019

왜 세 번이나 물어봐야 해?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1

왜 세 번이나 물어봐야 해?

첫 번째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그와 나의 딱 중간지점인 90 어딘가 스트릿에서 만나자고 단호하게 메시지가 왔다. 내가 어디 사는지 조차 물어보지 않고 지맘대로 정하는 게 첨부터 심상치 않다. 보통 여자에게 어디서 보는 게 좋냐고 물어보고 상의해서 정하는 게 여태까지 내가 만나온 남자들이었는데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 


여자에게 맞춰주기 귀찮은 건가? 아님 거기서 약속이 있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 동네를 잘 아는 걸까? 


자기가 검색해봤더니 여기서 만나는 게 좋겠다 하는 걸 보니 굳이 아는 레스토랑이라서 가는 것 같지는 않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다 갑자기 든 생각은


미국인이라서 그런가??


결론을 문화 차이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지금은 내 남자 친구가 된 이 남자의 특기이고, 세계인은 모두 비슷한 감정을 지닌 동물이라고 믿는 나는 그 사고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그거 말고는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제와 알고 보니 그냥 중간쯤 일 것 같고 구글에 검색해서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정했단다. 생각이 단조롭고 심플하다. 생각이 없는 편에 속하는 것 같다. 내 주변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미우면서도 본받고 싶은 부러운 면 중에 하나를 이 친구도 갖고 있다.


의사소통 과정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더 이상하게도 만나기가 꺼려질 정도로 싫지는 않았다. 대략 중간쯤이기도 하고, 리더십이 있어 보였다. 어설픈 배려심보단 대놓고 리드해주는 남자가 좋다.


약속을 잡고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동안 그에게 단 한 번도 연락이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우리 내일 만나는 거 맞죠? 내일 봐요.’라고 문자라도 한 통 보내줄 텐데 도통 소식이 없다. 아마도 나를 까먹었거나, 다른 약속을 잡았거나, 내게 흥미가 없어진 것 같다. 더구나 데이트 앱으로 만나려다 보니 아무리 유료라지만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이다. 최첨단 연애 시스템에 나와 함께 공존하는 남자들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끝판왕인 결론이다. 그렇다고 굳이 내가 먼저 내일 만나기로 한 일에 대해 컨펌받고 싶지는 않다.


얼굴만 번지르르하고 매너가 꽝이네. 얼굴도 실제로 보면 다를지도 모르고, 나이도 어린데 그냥 잘 됐다 싶어 나는 약속시간인 8시에 머리도 안 감고 침대에 누워 잠옷바람으로 뒹굴거렸다.


9시에 전화가 왔다.


기다리고 있단다.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대략 기억을 거슬러보면 ‘너한테 연락이 없길래 약속이 취소된 줄 알았어. 미안해. 지금부터라도 빨리 준비하고 출발하면 한 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 텐데 괜찮겠어?’라고 말했는데 몇 퍼센트가 전달이 됐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응. 괜찮아. 천천히 와.”


머리는 감을 생각도 못하고 대충 아무 보이는 옷이나 걸쳐 입고 샌들을 질질 끌고 아홉 시 반쯤 지하철에 올랐다. 친구를 만나도 이러고는 안 만난다. 이 남자 안 그래도 오래 기다렸는데 나보고 더 열 받으면 어떡하지 싶어서 걱정했지만 만나기로 해놓고 연락 안 한 남자가 잘못이라고 다시 합리화를 한 뒤 마음을 다잡았다.


도착한 시간은 열 시쯤.


밖에 나와있는 사람이 한 명 보인다. 얼굴은 하얗고, 머리는 짙은 갈색의 반곱슬에, 눈은 머리색과 같은 짙은 갈색이고, 몸은 적당히 마른 편이고, 키는 적당히 큰 편이다. 가까이서 보니 조그만 얼굴에 눈코입이 다 큼직큼직하게 붙어있다. 낯설고 괴의하다. 급한 맘에 다가가서 이름을 물었다.


”도미닉?” (이하 ‘민익씨’ 혹은 ‘민익이’)


맞댄다.


악수를 하려다 얘네는 포옹을 하나 싶어서 포옹을 하려다 어색해서 그냥 악수를 했다. 민익씨도 손을 내밀었다 포옹을 하려고 했다 다시 손을 내밀며 어색한 맞장구를 쳤다. 표정은 웃고 있지만 만나자마자 진땀이 난다.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전형적인 미국의 펍(pub)이다. 꽤 유명한 곳인지 사람들이 꽉 차 있고 그들이 내는 목소리가 하도 커서 귀가 멀 것만 같다. 이 시간에 이 멀리까지 와서 귀먹을 걱정을 해야 한다니 짜증이 나려고 한다. 하지만 두 시간이나 기다린 사람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갈 곳을 알아봐 줘서 고맙다고, 조금 시끄럽긴 한데 괜찮은 곳 같다고 했다. 남자는 칭찬에 약하다. 그래서인지 민익씨는 아직도 어딘가 가고 싶다고 맡기면 척척 괜찮은 곳을 찾아내고 세상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보여준다. 사실 처음 만나는 곳이 너무 소개팅 티가 팍팍 나도 부담스럽고 어색하다. 이 남자한테는 지금까지도 이상하리만치 웬만한 건 이해가 된다.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할 메뉴를 물었다. 캐주얼하고 수수하면서 쿨한 여자가 되고픈 나는 평소 즐겨마시는 맥주인 버드와이저와, 밤늦게 많이 먹지 않는 자기 관리를 할 줄 알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여자가 되고픈 나는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같이 나눠 먹을 수 있을만한 랍스터가 들어간 맥 앤 치즈를 안주로 주문했다. 민익씨는 햄버거 세트를 시켰다. 두 시간 동안 저녁도 못 먹고 나만 기다렸는데 처음 만났지만 마음이 짠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미국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과 음식을 나눠먹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자기는 자기 것만 먹고, 혹시 다른 사람 것을 굳이 먹어야 한다면 상대방이 먼저 권해야 하고, 깨끗한 수저로 따로 덜어먹어야 한다. 연인이라면 같이 먹을 수도 있지만 우린 처음 본 사이다. 다행히 민익씨는 별 거부감 없이 내 맥 앤 치즈를 잘 뺏어먹었다. 항상 자긴 정신적으로 아시안(spiritually asian)이라고 우기는 남자답다.


대화는 겉돌았다. 

민익씨는 난생처음 신입을 뽑는 임원처럼 나에게 질문세례를 했고, 우리의 이야기는 맥락 없이 중간중간 뚝뚝 끊어진 줄줄이 소시지처럼 이상하게 이어졌다. 평소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어나가는 데는 자신이 있다고 믿어왔던 내가 강적을 만났다. 암만 노력해도 대화가 재미가 없다. 재미없는 대화 중 그에 대해 알아낸 정보들은 남중 남고를 나왔고, 게임을 좋아하고, 플로리다에 있는 게임학과를 나왔고, 지금은 전기회사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는 것들이다. 게임학과는 공대처럼 남학생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단다. 맙소사.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머나먼 미국 땅에서 남중 남고 남대생을 만난 것이다. 이 남자 긴장을 너무 해서 커다란 입은 열심히 움직이는데 얼굴이 굳어있다. 웃기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여자에게 묻지도 않고 만날 장소를 정한 게 이제 이해가 된다. 이 남자는 쑥맥인 것이다.


계속되는 인터뷰에 지루함이 느껴져 핸드폰 시계를 봤다. 그렇게 많은 질문과 답변을 했는데 아직 12시밖에 안됐다. 한국에서도 없던 통금이 생길 것만 같다. 시간이 늦어서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공지능 로봇처럼 웨이터에게 체크를 달라고 했고, 늦게 온 내가 사겠다고 했지만 꿋꿋이 계산을 했다. 내가 싫지는 않은가 보네 싶었다.


이 시간에 이 멀리까지 나온 건 처음이다. 맨해튼에 2년 넘게 살면서 90가쯤에는 와 본 적도 없다. 택시를 타기는 돈이 아깝고 지하철 역이 가까이 있어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무서워서 민익씨가 데려다줬으면 싶었는데 마침 물어본다.


“데려다줄까?”


나는 예의상 괜찮다고 했다.


“알겠어. 잘 가.”


한 번만 더 물어봤으면 고맙지만 괜찮겠냐고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데려다 달라고 하려고 했다. 나의 예의 바르고 자연스러운 계획이 빗나갔고 민익이는 쿨내를 풀 풀내며 혼자서 택시를 부르고 앉아 있었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 그가 이미 택시를 부른 것이다. 단호한 결단력이 여기서 또 나올 줄은 몰랐다. 동양의 두 번 거절 세 번 승낙의 법칙이 여기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예스는 예스, 노는 노일뿐, 여긴 노노 예스가 없었다. 간혹 두세 번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인심 좋은 친한 할머니가 먹을 것을 챙겨주고 싶어 한다던지 하는 아주 특수한 경우에만 그랬다.


지금도 남자 친구는 왜 처음부터 솔직히 말하면 될 것을 세 번이나 물어봐야 하는지, 대답을 바꾸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지, 예의가 없어 보이는 행동을 왜 예의가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단다. 난 ‘단번에 승낙하는 건 없어 보이거나 무례해 보이니까!’라고 못 박고 더 이상의 반박은 거부하고 있다.


결국 나는 늦은 시간에 혼자 지하철에 올랐고 자정이 넘은 뉴욕 지하철은 역시나 살벌했다. 술 취해서 배짱이 두둑해진 남자들이 대놓고 찝쩍였고 그것은 지하철에서 내린 뒤에도 이어졌다.


일주일 내내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머나먼 여정을 거쳐 인터뷰에 임하게 하고 밤늦게 혼자 터덜거리며 집에 돌아가게 한 처음 만난 그놈이 원망스럽다.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가 악귀에 씌어버린 프로도가 된 것 같다. 한 번 거절했더니 뒤도 안 쳐다보고 돌아선 이 자식이 괘씸했다. 무서움을 견뎌낼 빛의 속도로 뛰다시피 걸어왔다. 집에 도착해서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잘 도착했냐는 메시지조차 없다.


“어땠어?”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룸메이트가 첫 데이트를 묻는다.


“뭐 나쁘진 않았는데, 다시 만날 것 같지는 않아.”


사실 나빴다. 그런데 엄청나게 나쁘진 않았다. 뭔지 알 수 없는 찝찝한 감정들이 있었지만 굳이 다시 만나 알아내고 싶지 않았다.


메시지가 없는 것을 보니 그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구나 싶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씁쓸한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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