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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Feb 25. 2019

키스해도 되나요?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2


‘어젯밤은 진짜 재밌었어. 노래방은 언제 갈까?’


썩 좋지 않았던 첫 데이트 다음날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혼란스럽다. 폭풍 문답 시간이 그에게는 즐거웠나 보다. 면접을 보고서 이 회사는 돼도 안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입사를 축하합니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받은 기분이다.


어제의 인터뷰를 회상해보았다. 찝찝했던 감정들을 정리하고 어떤 방향으로 답장을 할지 결정할 작정이다. 순 수 청 년. 사실 뭐 제대로 생각해 볼 것도 없다. 순진무구한 스케치북에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 그림을 그리다 왔다. 다만 차이점은 그가 주제를 던져줬고, 그 주제들은 문화센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에게 적합했다.


순수한 게 죄가 되나요?


이 사람을 만나기 전 나는 데이트 폭력 성향이 있는 동갑내기 재미교포와 만났다. 그는 만난 지 한 달만에 나에게 청혼을 했고, 그의 어머니는 내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식칼을 들고 나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그는 꼭두새벽에 엄마와 함께 살던 집을 나와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내가 친구를 만나면 갑자기 찾아오거나 같이 만나자고 해서 친구와 함께 있는 내내 심통을 부리거나 진상을 떨어 친구들과 멀어지게 만들었고, 학교에서 과제를 하고 있으면 찾아와 곁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나만 지켜보며 밤을 새웠다. 무서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자연스러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고, 그 자연스러움은 기억력을 따라가지 못해 나중에 우연히 흘리는 말들에서 거짓이 탄로 났다. 앞사람이 느리게 걷는다던지, 종업원이 무례하다던지 하는 사소한 일들에 걸핏하면 화를 냈고, 그런 성향은 특히 운전을 할 때 심하게 드러났다.


당연히 그 화는 결국 나에게도 미쳤다.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며 공공장소에서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협박을 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공포감에 떨면서 나는 그 길로 도망쳤고 그에게 헤어짐을 고했다. 그는 일주일 넘게 나의 집과 학교 근처를 서성이며 스토킹을 했다. 어느 날 학교 근처에 숨어있다 지나가던 내 가방을 낚아채 자기와 당장 이야기하지 않으면 돌려주지 않겠다고 소란을 피운 일 이후로 내가 학교 밖을 나갈 때는 학교에서 근무하는 경찰 두 명이 붙었고, 접근금지명령을 내리기 위해 가정법원에 갔다.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나서 찬찬히 내 주변을 돌아보니 교포나 중고등학생 시절 미국으로 넘어온 친구들에겐 말 못 할 사정이 많았다. 대개는 돈이나 가정불화의 문제였다. 한국에서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넘어와 어렵게 산 경우가 꽤 있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연애할 때 가정환경을 체크해보는 건 필수이지만 외국생활을 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혹여 위험한 상황에서 나를 보호해 줄 가족이 주변에 없고,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꽤 있으며, 외국 땅에선 심심찮게 별 일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요즘 유명한 가스 라이팅의 표본이었던 그에게 애초에 길들여졌던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그는 플래너였다. 항상 멋진 데이트를 계획하고, 좋은 음식, 와인, 위스키 등에 대해 잘 알았다. 유명 레스토랑들에 데려가 온갖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고, 항상 가까이에서 사소한 것들을 챙겨주었다. 가끔 작은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꽃 한 다발씩을 안겨줬다. 조금 사납게 생기긴 했지만 활짝 웃으면 순해 보였고, 나름 반반한 얼굴이었다. 키가 컸고, 자기 관리를 잘했다. 한국인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와 만나면서 그리고 헤어진 후 자존감이 바닥을 친 나는 괴물에게 내 사생활에 너무나 깊숙이 스며들도록 허락하고,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충격과 공포, 슬픔과 아픔, 그에 대한 원망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에 뒤섞인 혼란과 절망의 도가니탕에 빠진 채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오랜 기간 유일하게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해 준 친한 언니가 직장동료가 이걸 통해 좋은 사람을 만났다며 나가서 누구라도 만나보라고 추천해 준 유료 데이팅 앱이었다.


처음 프로필을 등록할 때 쏟아진 100개 이상의 질문들은 정치나 가족관계를 비롯해 아이, 결혼, 연애, 섹스 등의 가치관을 아울렀다. 그리고 70-80퍼센트 이상 생각하는 방식이 맞는 사람을 추천해줬다. 그의 프로필을 다시 훑어보았다.


순 수 청 년.


공개용 질문들에 그는 마치 이력서를 써 내려가듯 최선을 다해 정직하게 답했다. 귀엽다. 그런데 만나보니 그 정도가 지나쳤다. 그래도 순수한 건 죄가 되지 않는다.


생각이 가운데를 향해 기울 때쯤 그에게 다시 메시지가 왔다.


“이번 주 토요일 저녁 어때?”


로봇과 통계학이 나에게 과학적으로 소개해 준 최첨단 시스템을 한 번만 더 믿어보자. 이번에도 영 아닌 것 같으면 그땐 정말 관두지 뭐.


“그래. 몇 시에 볼까?”


“여덟 시 어때?”


“응. 좋아.”


상대가 아주 맘에 들지 않을 때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게 나중을 위해 낫다.


그대로 토요일이 되었다. 일주일 전의 기억이 희미해져 기분이 좋다. 전남친의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너무 오래 집에만 있었다. 오늘은 토요일 저녁에 혼자 집 침대에서 뒹굴거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원하는 대로 화장을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옷을 입었다. 상대가 누구든 이 자체로 재밌고 신난다.


그가 내 앞에서 웃고 있다.


지난번 봤을 때처럼 인상은 아주 귀엽고 멀쩡하다. 이번에 우린 제시간에 만났고, 내가 악수를 청하기 전에 그가 먼저 잘 지냈냐며 가볍게 볼을 맞댔다. 좋은 향기가 난다.


노래방에 들어가기 전 근처에 있는 바에서 이야기를 했다. 또다시 긴장한 미스터 로봇 씨는 연거푸 빠른 속도로 잭앤진저 다섯 잔을 마셨다. 그는 술이 들어가면 목소리가 커지고, 유머감각이 상승한다. 수줍은 처녀 뒤에 쾌탈한 아저씨가 살고 있다. 지난번에 질문을 다 해버려서 질문거리가 떨어졌는지 이번에는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도 곧잘 한다. 지난번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인데 더 지켜봐야 알 것 같다. 다시는 이상한 남자를 만나 고생하고 싶지 않다. 이번에는 신중하고 싶다.


54가 8 애비뉴에 있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노래방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그가 골랐다. 역시 리서치 능력이 괜찮다. 노래방은 한인 타운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가 훨씬 저렴하고 쾌적하다. 한인타운의 노래방들도 이랬으면 좋겠다.


그는 생각보다 노래를 잘했다. 잘생기고 매너 좋은 이탈리안 아버지와 아름다운 도미니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답게 옆선이 수려했고, 목소리가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르는 곡들이 내 마음에 들었다. 장르를 불문하고 아는 음악의 범위가 넓었고, 백인들은 재미없게 논다는 흔한 편견을 깨트렸다. 한의 정서가 한껏 묻어나는 한국인 특유의 소몰이 창법을 듣지 않아도 되어서 새로웠고, 임재범의 고해나 버즈의 가시 같은 노래를 듣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게 놀았다.


헤어질 시간이다. 이번에도 새벽 두 시다. 지금은 밤 열시만 되면 하품을 쩍쩍하는 사람이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놀았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연애 초기에 도파민이 흘러나와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된다는데, 그 경우였나 보다.


“데려다줄까?”


지난번 두 번 거절 세 번 승낙 작전의 쓰디쓴 참패를 맛본 후 다시 온 기회다. 이번에는 동방의 예의이고 뭐고 절대 혼자서 지하철을 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답했다.


“응!!!!”


사실 안 물어봤어도 데려다 달라고 요구할 요량이었다. 그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택시를 탈래 걸을래 묻는 그에게 걷자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사소한 일에도 내 의사를 묻는다. 둘 다 아직 흥이 가시지 않은 채로 흥얼거리며 걸었다. 걷는 것을 죽을 만큼 싫어하는 민익씨는 연애 뽕에 잔뜩 취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유월의 뉴욕 밤공기는 살큼했고, 우리의 목소리는 그것에 잘 어우러졌다.


집 앞에 도착했다. 그가 어쩐 일로 문 앞 까지 데려다주겠다며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떠올랐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를 비롯해 등장인물들이 데이트 끝에 달콤하게 하는 키스가.


남자의 한 손은 부드럽게 여자의 뒷목과 머리 사이를 잡고, 다른 한 손은 휘감아 맞은편 허리가 잘록해지는 지점을 잡는다. 여자는 살짝 까치발을 한 채 약간 뒤로 꺾여 남자에게 무게중심을 맡기고, 양손으로 그의 넓은 등판을 가볍게 느낀다. 둘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격렬한 듯 부드럽게, 강렬한 듯 달콤하게 키스를 한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미스터 로봇이다. 어떤 또 다른 신기한 말이나 행동으로 나를 놀라게 할지 모른다. 방심해선 안 된다.


내가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로맨스와 음란함 사이에서 신나게 외줄 타기를 하고 있을 때 그가 말문을 열었다.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어.”


하던 브레인스토밍을 멈추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최대한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뭔데?”



“키스해도 돼?”



섹스 앤 더 시티와는 거리가 멀고, 청춘만화에 나오는 중학생이 된 것 같다. 국어책에 서울로 이사 가기 전 날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함께 개구리 잡고 도랑치던 옆집 소년이 소녀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질문 말이다.


거절하면 이 남자 쿨하게 택시를 잡을 거고, 승낙하면 고작 두 번 만난 남자와 키스를 해야 한다. 상상 속의 온갖 대담한 여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조선에서 온 세상 조신한 여자가 나타났다.


고민하던 찰나에 뭔가가 훅하고 내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다. 그는 나비처럼 날아와 내 입술에 꽃가루를 날렸다. 입이 닿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설명하긴 어렵고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부끄럽다. 조선에서 온 여자가 용납할 수 있을 정도로 수정된 결백한 코리안 아메리칸 키스이다.


“How about that?”


그가 작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한 마디 한 뒤, 웃으며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로봇의 반란이다. 소녀 같은 이면에 함께 살고 있는 쾌탈한 아저씨에게 약간의 터프함이 숨어있는 걸까? 앞으로 이 사람을 만나면 더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될까?


긴장의 끈을 놓자 그가 궁금해졌다.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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