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3
민익씨가 고른 우리의 세 번째 데이트용 영화이다. 그답다. 술 마시고 용기가 생긴 부끄럼 많은 로봇이 코리안 아메리칸 키스로 내 입술을 빼앗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사건 다음날 아침 그는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제 내가 너무 강하게 다가갔다면 미안해.”
미국에서 헤어질 때 하는 인사쯤인가 보다 싶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고, 그 당시 난 조금 더 강한 걸 상상하고 있었기도 했다. 내가 호감이 없었다면 키스해도 괜찮겠냐고 물어왔을 때 싫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도 미스터 로봇 씨는 집에 가서 이불을 찼나 보다. 당차게 이건 어떠냐 하며 로봇의 반란을 보여줄 때는 언제고 이불 차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난다. 신기하게 이 남자가 하는 일들은 내 눈에 크게 성가시지가 않다. 늘 내 의사를 물어보고 고민하는 과정이 눈에 훤히 보여서 일까. 맑은 민물에 사는 송사리 수준이다.
“괜찮아.”
쿨하게 진심을 전했다.
여느 때처럼 중간지점인 80 몇 가쯤의 영화관 앞에서 만났다. 집 앞까지 데리러 오던 전남친에게 익숙했는데, 이제는 중간에서 보는 것도 익숙해졌다. 약속보다 이른 시간에 찾아와 집 앞에서 하염없이 나만 기다리고 있는 건 부담스러웠다.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전남친 생각에 젖어있는 찰나에 민익씨가 말을 걸어왔다.
“나 또 중요한 거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키스하자고?”
대뜸 되물었다. 당황한 눈치다. 로봇이 예상치 못한 답변에 오류가 걸렸다. 괜찮다고 하니까 맨 정신에 한 번 더 하고 싶었나 보다. 갈 곳을 잃고 버벅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에 관한 거라면 나도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미국 티비쇼 같은 거 보면, 미국 사람들은 만나면 반갑다고 헤어질 때 또 만나자고 가볍게 키스를 하던데, 네가 한 키스도 그런 의미야?”
매우 당황한 눈치의 민익씨가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 키스는 어떤 사람이 너를 되게 많이 좋아하면 하는 거야!!!!!!”
“아, 그렇구나.. 난 네가 한 키스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
.
.
.
그럼 해도 돼.”
세상 쿨하게 대답한 후 그의 입술은 또다시 나비처럼 날아와 번개처럼 날아갔다. 지쟈스. 나를 엄청 좋아한다는 소년의 수줍은 고백에 넘어가 호탕하게 또 한 번 나의 뽀뽀를 양보하고 나서 깨달았다. 이렇게 진도가 꼬인 것은 처음이다. 한국에서는 뽀뽀부터 하고 사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심지어 클럽에서 만난 남자가 키스를 하려고 할 때 너 나랑 사귈 거냐고 진지하게 물어봤던 나다. 이건 아닌 것 같다. 이거슨 나에겐 너무나 아메리칸이다. 로봇의 반란이건 순백의 도화지건 당신 아메리칸이 사귈 이 여자는 코리안이다. 순서를 바로 잡아야겠다. 동방의 예의를 가르쳐야겠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며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화가 어땠냐는 민익씨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이 순서를 어떻게 바로잡나 하는 생각에 이미 영화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거미인간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지구를 구한 영화의 시리즈 물이다.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어 그냥 괜찮았다고 했다. 그는 너무 재미있었나 보다. 신이 난 로봇 어린이는 영화의 평점을 매기고 있다. 지가 한 가벼운 애정행각 때문에 상대방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어.”
세상 신난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라면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진다.
그가 웃으며 그래도 된단다. 손을 잡았다. 긴장을 했는지 그의 손이 이내 민물고기처럼 축축해졌다. 로봇도 땀이 나는 게 신기하다. 지금도 가끔 손이 축축해지면 ‘너 손이 물고기 같아. 깔깔깔’ 하고 놀린다. 그럼 얼굴이 빨개져서 ‘오, 노. 허니...’ 하고 손을 놓으려고 한다.
아무튼 그때는 그 정도로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축축한 손을 놓지 않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보통 소개팅(blind date)을 하면 세네 번 정도 만나고, 사귀자고 하고,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고... 그런 식이야. 그런데 우리는 키스부터 했고, 네가 나를 많이 좋아해서 했다고 하니까 내 입장에선 순서가 뒤섞인 것 같아 좀 헷갈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미국에선 남녀가 만나 사귀거나 결혼을 하거나 등의 공식적(official)인 관계로 나아가는 데 우리의 전통적인(?) 방식에 비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서로 마음에 들면 스킨십부터 하고, 오랜 기간 더 만나본 후 이 여자다 싶으면 사귀자고 하거나, 아예 그 질문을 생략하고 자연스럽게 커플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결혼 전 동거는 매우 보편적이고, 그 과정에 아이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도 청혼을 하고 약혼을 한 뒤 최후에 결혼식을 올린다.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뱉는데 그렇게 뜸을 들일 수가 없다. 그래도 자신의 연인을 선택하고 사랑을 주는 과정에 신중을 기한다는 점에서 나는 서양의 방식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렇게 진도가 꼬인 경우는 다르지. 그들의 문화를 존중한다고 해서 내가 억지로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니까. 여기서의 순서가 그렇든 말든 나를 만나고 싶으면 내 순서를 따르라는 흥선대원군 같은 발언이었다.
나이 서른을 넘기자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며 나에게 스킨십을 하는지는 웬만하면 눈에 빤하다. 방심하는 찰나에 훅 들어가는 질문을 던지고 무심결에 돌아오는 대답을 들어보면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순진한 사람인지, 그냥 잠시 갖고 놀려는 의도인지 분간이 간다. 이십 대에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숱한 마음고생을 한 훈장이자, 오랜 연애와 도처에 있던 남자 사람 친구들을 통해 터득한 노하우다.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는 서른 줄 연애의 장점이다.
민익씨가 음흉한 남자가 아니란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그려갈 생각인지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서로를 가볍게 생각하는 관계는 내게 맞지 않는다. 나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한 사람만 만나는 독점적인(exclusive) 관계로 이어질 생각이 있는 건지 떠 볼 속셈이었다.
하지만 인터넷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 급작스런 고백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난 아직도 가끔 이 로봇을 백 프로 신뢰하지 못하고 그가 야심 차게 준비한 계획의 마지막에 초를 친다. 역시 조급함은 만사에 안 좋다.
급진적으로 이어져버린 전개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사실 그걸 물어봐주길 바라서 얘기를 꺼낸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물어봐줘서 고마워. 나도 너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근데 아직은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좀 더 만나보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
얼떨결에 자유분방한 미국인을 상대로 초밀당 고수녀가 된 기분이다.
진지한 얼굴로 알겠다고 한 민익씨는 조금 풀이 죽어 보였다.
미국 남자랑 밀당을 하게 될 줄은 꿈도 꾼 적이 없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