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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Mar 11. 2019

우리 연애할까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4


2017년 8월.


도미닉 더 로봇과 만난 지 2개월이 흘렀다. 그가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유성우(별똥별, Meteor Shower)를 보러 공원에 가자고 제안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시기는 매년 7월 중순에서 8월 말 사이라고 한다. 어두컴컴한 공원에 무수한 별이 떨어진다니, 기대가 된다. 이런 이벤트를 찾아 준 것이 기특하다. 왠지 오늘은 다시 뽀뽀를 허락해야 할 것만 같다.


별똥별을 보기로 한 공원도 역시 우리의 중간 지점인 80 몇 가쯤. 강가 쪽이라 보통 만나던 곳보다 인적이 드물어 조금 무섭긴 하지만 이제는 낯선 곳도 그와 함께 있으면 무섭지 않다. 어느 정도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고, 너무 늦으면 고민하지 않고 무서우니 집에 데려다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민익씨가 공원에 가기 전에 피자를 먹자고 해서 피자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공원 근처의 피자집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고급스럽고 분위기가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이번 데이트 코스 선정을 도와준 배후가 있는지 의심이 된다. 뿌듯해하던 찰나에 맞은편 무너져가는 피자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가지 레벨의 피잣집이었다. 같은 사람이 하는 집이면 분위기 값이나 더 받겠지 생각하며 고급 피자집을 뒤로하고 길을 건넜다. 그리고 도움을 준 배후는 없는 걸로 결론지었다.


저렴하고 평범한 치즈 피자였다. 앞서 이런저런 기대를 하긴 했지만, 막상 데이트를 할 때 음식의 맛이나 음식점의 분위기는 내게 그다지 중요치 않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같이 먹는 사람이 좋으면 행복하고, 최고로 맛있는 음식도 불편한 사람과 먹으면 집에 가고 싶다. 그에게 내 마음이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는 순간이다.


피자를 먹으며 우리는 캔콜라를 빨대로 먹는 이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우린 아직도 아이폰이 좋냐 삼성폰이 좋냐, 마크 주커버크는 대단한 사람이냐 아니냐 등의 남들이 보면 도대체 왜 저런 걸로 논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주제들로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한다. 싸이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 끝장토론을 하시던 우리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쨌든 그는 내가 캔콜라를 빨대로 먹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내 콜라를 빨대로 빨아먹든 두 손으로 받아서 먹든 무슨 상관이냐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꾹 참고 인내심 있게 답했다.


”캔콜라를 빨대 없이 그대로 마시다간 입술이 베일 수도 있어.”


내 말을 듣고 한국은 캔 콜라를 만드는 기술이 덜 발달했나 보다 하고 심각하게 고민을 한다. 한술 더 떠 미국의 캔 콜라는 위험하지 않으니 안심하라며 웃는다. 한국을 캔 콜라 만드는 기술도 없는 나라로 만든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실제로 플라스틱 수저로 수프를 먹다가 입술을 베었던 얘기를 하며 캔 콜라도 충분히 위험하다고 말했다가 플라스틱 수저도 못 만드는 나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은 내 입술의 허약함을 탓하며 급히 결론지었다.


입술 얘기를 계속하다 보니 서로의 눈길이 입가에 오래 머문다. 시원하게 큰 입에 적당히 오동통한 그의 입술은 주름도 없이 매끈하다. 보통 백인들은 입술이 얇아서 잘 보이지도 않던데 이 남자 입술은 섹시하다. 오늘은 내가 덮쳐버릴까, 나도 몰랐던 내 속의 과감한 미국 언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공원에 도착해 아무리 기다려도 별은 떨어질 기미가 없다. 공원 옆으로는 시커먼 강이 흐르고, 공기 중엔 안개가 자욱하고 하늘은 구름이 가득 꼈다. 귀신이 나올 것 같다. 졸지에 공포체험 분위기가 되었다. 무서운 분위기는 사람의 심장 박동수를 늘리고, 썸 타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좋아할 때 두근거리는 상태로 뇌가 착각을 하게 만든다고 한다. 가뜩이나 무서운 공포체험 중에 사나운 강아지가 불쑥 튀어나와 다른 강아지를 향해 사납게 짖었다. 나도 모르게 “꺅!!!!”하며 그에게 팔짱을 꼈다. 로봇은 담담하게 걸어가며 호탕하게 웃는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계획하지 않은 아름다운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연출된다. 책으로 배워 온 연애기술들이 무색하다. 정말 인연이란 게 있는 걸까.


어두운 공원에서 팔짱도 꼈겠다, 이번엔 확 내가 먼저 뽀뽀해버릴까 싶어 다양한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는데 그가 벤치에 앉자고 한다. 구름이 자욱한 하늘을 바라보며 ‘별똥별이 없네...’하고 시무룩해한다. 내가 과감한 미국 언니를 소환하는 동안 그는 별똥별 생각에 잠겨 있었나 보다. 내게 별똥별을 보여주러 여기까지 왔는데 영 실망한 눈치다. 괜찮다며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의외로 어깨가 넓다. 살며시 눈을 감자 얇은 티셔츠 사이로 그의 온기가 느껴진다. 이 로봇이랑 사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뜬 순간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별똥별보다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쉽게 사귀기로 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데이트 폭력의 악몽을 제외하고도 세 가지가 있었다. 인종, 나이, 만나게 된 계기이다.


인종은 요즘도 가끔 보면 창백하고 나와는 너무 다르게 생겨서 새삼스레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해결이 가능한 문제다.


다음으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온 나지만 그의 나이는 고민이 될 정도로 나에 비해 어리다. 그나마 백인들은 피부가 얇아 빨리 늙어 보인다는데 지금도 그것만 믿으며 열심히 마스크 팩을 붙인다.


마지막으로 그나마 가장 덜 고민한 부분인, 만나게 된 계기이다.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지켜보지 않는 한 어플로 만난 남자는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민익씨는 데이트마다 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속이 훤하다. 인종과 나이를 떠나 믿을만한 사람 같다.


그래도 여전히 인종과 나이는 그 당시 나에게 큰 걸림돌이었다. 다른 사람도 만나볼까 싶어 어플에 가끔 들어가 봤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 내가 찾는 사람의 기준이 특이한 건지 70% 맞는 사람 조차 거의 없다. 환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지금 접속해있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기능을 알았다. 홀린 것처럼 민익씨의 프로필을 들어가 봤고, 불길한 예감은 거의 틀린 적이 없다. 접속해있다는 표시인 초록 동그라미가 그의 프로필 하단을 밝히고 있었다.


그가 사귀자고 한 것을 내가 거부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자기가 사귀자고 한 사람을 두고 계속 어플을 사용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연락을 끊기로 했다.


폰 번호는 차단했고 전화는 받지 않았다.


감정에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나를 많이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 내심 기뻤는데, 내 뒤에서 꾸준히 어플을 이용하고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괘씸하다. 잠수를 당해도 싸다.


잠수 3일쯤 되던 날 모든 수단을 차단당한 그가 어플로 메시지를 보냈다. 어플은 차단해두지 않았다. 순간 다양한 생각들이 스쳐갔다. 나도 그를 좋아한다고 해놓고 매일 어플을 확인하고 있었고, 내가 고민하는 것들을 그도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직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으로부터 독점적인 관계가 되자는 제안을 거부해놓고, 상대방만 독점적으로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도.


순식간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끝낼 땐 끝내더라도 결론짓기에 가장 좋은 방법을 시도했다. 솔직하게 털어놓기다.


“Hey”


그에게 답장을 했다. 사정이 있었노라고. 전화를 해도 되는 상황이냐고. 그러지 그가 괜찮다고 꼭 전화를 해 달란다.


민익씨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하다. 자기가 잘못한 게 있냐고 묻는다. 혹시 잘못한 게 있어도 앞으로는 그냥 연락을 끊지 말고 뭔지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네가 어플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더 좋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 같아서 연락을 끊었어. 아무 말도 없이 연락을 끊어서 미안해. 그렇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줘.”


다이렉트로 꽂아 넣은 공격에 그가 할 말을 잃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구구절절이 변명을 하면 그대로 안녕이다. 그런 사람과는 더 이상 구차하게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다.


“미안해. 난 네가 좋아. 그런데 네가 나만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도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나 싶어서 체크를 하긴 했어. 그렇지만 난 아직도 네가 좋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상처 줬다면 정말 미안해.”


사귀자는 그의 제안을 그럴싸하게 돌려서 잘 밀어냈다고 생각했는데, 거절은 그저 거절이라고 받아들인 것 같다. 이해가 완벽히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구차한 변명이나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막상 나 자신도 다른 사람을 찾아보려고 계속 어플에 들어가 마음에 들지도 않는 사람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정작 마음은 그에게 가 있는데 말이다.


서로 좋아하면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다음날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멀리 나가기가 괘씸해 우리 집으로 불렀다. 룸메이트들과 함께 지내고 있어 거실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기로 했다. 골뱅이무침을 했다. 내가 먹어도 맵다. 먹든지 말든지. 괘씸히 여기는 마음이 따뜻한 마음씨를 이겼다.


딩동


그가 왔다. 우리가 눈이 마주치면 그는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나는 반달눈이 된다. 우린 서로 좋아하는 것 같다. 명쾌하게 그가 묻는다.


“독점적으로 만나는 연애를 시작하는 거에 대해서 생각은 다 마쳤어? 내가 다시 물어보면 이번에는 대답해 줄 수 있을까?”


귀여운 또봇이 훅들어오니 누나는 골뱅이무침마냥 맥을 못 춘다.


“좋은 생각이야.”


이제 이 로봇은 한눈팔면 영원히 강제전원 끔이다.






실제로도 자꾸 마음에 안 들게 하면 전원을 꺼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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