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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Mar 18. 2019

센트럴 파크에 로보트 보러 가기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래 ep.5


우리가 사귀기로 한 뒤 처음으로 맞는 주말,


민익씨가 센트럴 파크에 로봇을 보러 가자고 했다.

로봇? 자기랑 닮아서 보러 가자는 건가. 센트럴 파크에서 로봇 전시회라도 하나 싶어서 신기한 마음 반 가기 싫은 마음 반으로 알겠다고 했다.

공식적인 커플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주말에 데이트하는 날이다. 이제는 죄책감 없이 마음껏 손 잡아도 되고 마음껏 뽀뽀해도 된다. 기분이 묘하다.


뉴욕의 8월 답게 직사광선이 얼굴로 내리쬔다. 혹시 로봇들이 녹아내리지 않을까, 사진 찍을 때 손으로 만지면 데지 않을까, 그냥 다 녹아버려서 다른 걸 보러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심 여러 생각을 하며 센트럴 파트로 향했다.


건너편에서 내 외국인 남자 친구가 나에게 손을 흔들며 웃는다. 이제는 만나면 가볍게 입을 맞추는 인사도 익숙하다. 외국인이 다 된 것 같다. 민익씨는 라운드넥에 목 중앙에서 내려오는 버튼이 세 개 있는 하늘색 티셔츠를 입었다. 이쯤 되면 공식적으로 그가 홍보하는 티셔츠다. 그는 옷이 별로 없다. 민익씨의 여름 옷장은 청바지 2개, 즐겨 입는 티셔츠와 잠옷용 티셔츠 몇 장, 일하러 갈 때 입는 하얀색 와이셔츠 몇 벌이 전부다. 청바지 2개는 둘 다 리바이스인데 핏이 서로 다르다. 하나는 일자로 떨어지는 약간 타이트 한 핏의 섹시한 청바지이고 다른 하나는 통이 넓어 다리가 바지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청바지다. 서양인답게 다리가 길어 기장을 따로 줄이지 않아도 된다. 그는 나를 만날 때 섹시 청바지를 입지 않고 허우적 청바지만 입는데 그 이유는 편해서란다.

나는 왜 회사 갈 때만 예쁜 옷을 입는 거냐 내가 회사 사람들보다 못하냐 하며 분통을 터트리지만 민익씨는 그럼 자기가 데이트할 때 옷 때문에 불편해하는 걸 보고 싶냐고 하니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나는 그를 만날 때 불편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한껏 꾸미는 편인데 암만 생각해도 불공평하다.

미국 남자들이 옷을 못 입는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못 입는다기보단 안 입는 것 같다. 패션에 신경 쓸 이유를 못 찾는다고 해야 하나. 패션과 관련된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이 아닌데 패셔너블한 경우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있다 해도 동성연애를 하는 분들인 경우가 많다. 개방적인 나라라고 소문난데 비해 남성의 패션은 더욱 보수적이고 제한적이다. 핑크색 티셔츠조차 동성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함부로 못 입으니 말이다.


아무튼 민익씨는 그가 홍보하는 티셔츠를 입고 나를 로봇전시회로 데려가는 중이다. 이상하게도 도착하니 호수가 나왔다. 로봇이 때가 되면 강 밑에서 솟아 나오기라도 하는 건가 싶어 갑자기 흥미진진해진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노 젓는 보트를(row boat) 빌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여태 그의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로보트를 보러 가자는 줄 알았던 것이다. 로봇이 다 녹아서 못 봤으면 좋겠다는 둥 온갖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보트에 올랐다.


두 명이 서로 마주 보고 앉는 구조의 보트다. 한 명이 앉는 자리는 한 명 앉기엔 넓고 둘이 나란히 앉기에는 좁다. 남자들이 주로 노를 젓는다. 연인들이 많은 걸 보니 데이트 코스인가 보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 강 속에서 로봇이 등장하는 줄 알고 기대했다니, 민망하지만 언어가 다른 외국인과 데이트를 하면 앞으로도 각오해야 할 일이라고 보여주는 예고편 같다. 한 남자가 여자를 태우고 모터보트를 탄 것 마냥 온 강을 휘젓고 다닌다. 주변 사람들보다 세 배는 빠르다. 여자가 감동하니 남자 어깨가 한층 더 우람해졌다. 반면 우리 배는 도통 진도가 안 나간다. 민익씨도 처음 타 봐서 그런지 계속 제자리에서 빙빙 돈다. 저 무아지경의 모터보트를 제치고 싶은데 우린 제자리걸음만 하니 이상한 경쟁심이 생긴다. 그를 옆으로 조금 비켜달라 하고 나란히 앉았다. 내 지휘 하에 서로 한 짝씩 노를 맡아 헛둘헛둘하며 노를 저었다.


초록빛이 가득한 센트럴 파크 한가운데 고요한 호수에서 로맨틱해야 할 데이트가 철인 3종 경기 트레이닝 세션이 되었다. 끝내 모터보트를 제치지는 못했지만 두 명이 앉기에 좁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 함께 노를 젓는 커플은 우리 밖에 없었기에 동지애(?)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보트 데이트를 마치고 공원을 나가는 길에는 그에게 내가 잘 모를만한 미국 욕을 물어봤다. 욕 배우기는 나라를 막론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친해지거나 장난을 치기에 좋은 주제다. 웬만한 욕들은 그동안 본 미드에서 배워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모르는 게 많다. 국문과를 다닐 때 교수님 한 분이 씨발새끼라는 욕에 대해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주셨다. 씨발이라는 건 ‘씹+할’을 연달아 발음한 것인데 ‘씹’은 섹스를 뜻하고 ‘할’은 하다 라고 한다. 그래서 씨발새끼는 섹스할 수 있는 새끼라는 뜻이라서 알고 보면 씹 못하는 새끼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좋은 뜻이랜다. 민익씨가 영어로 fuck boy를 심한 욕이라고 가르쳐줬는데 내가 배운 그 단어와 뜻이 겹친다.


그에게도 가장 강한 욕 몇 가지를 가르쳤는데, 새하얀 남자가 어물어물 거리며 한국말로 욕을 하는 게 웃기고 신기해서 한참을 웃었다. 민익씨도 내가 미국 욕을 할 때 같은 기분인지 웃는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서로 다른 나라의 욕을 하다 자제하기로 했다.


근처에서 누군가가 희귀한 욕을 해도 알아들을 자신이 생긴다. 못 알아들으면 민익씨한테 물어보면 된다. 요즘은 내가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그거 있잖아 하면 자기가 알아서 문장을 끝내주거나 알아듣고 대답을 해주고, 내가 뭔가를 잘못 말하면 대놓고 고쳐주지 않고 나중에 또 그 얘기가 나왔을 때 올바른 표현으로 바꿔 말해준다. 대놓고 그건 틀렸다고 말하며 자신감을 팍팍 꺾어버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꽤 좋은 개인과외 영어 선생님을 뒀다. 언어 장벽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에 비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내가 센트럴 파크에 로보트를 보러 가는 줄 알았는지 모른다.






언어장벽은 국제 커플을 가로막는 난관입니다. 그 난관은 중요하지 않은 주제에 대한 싸움을 줄이거나 멈춰주는 순기능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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