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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Apr 12. 2019

내 남자 친구는 오타쿠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7


내 미국인 남자 친구는 오타쿠다.


미국에 있는 많은 미국인들이 그렇듯 일본문화를 흠모한다. 일본어를 곧잘 하고 나보다 잘 알아듣는다. 그가 일본문화에 흥미가 생긴 시기는 게임을 전공한 대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라고 한다. 친구들이 보는 일본 애니메이션(anime, ‘에나메’라고 불러요.) 몇 편을 옆에서 같이 보았는데, 나중에는 친구들보다 폭넓은 애니메이션들을 줄줄 꿰는 우등 오타쿠가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오타쿠를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영역이 있고, 그것에 대해 잘 알고 깊게 빠져드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면 말이다. 민익씨는 주로 여가 시간에 유튜브에서 게임 및 기타 재밌는 영상을 보거나, 트위치(미국판 아프리카 티비 같은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게임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스트리머들의 영상, 혹은 크런치롤(Crunchy Roll, 미국에서 일본 만화나 영화를 볼 수 있는 사이트)에서 일본 애니메이션들을 챙겨본다.


나도 중학생 때는 장르를 불문하고 일본 만화책을 즐겨 읽었다. 그들의 그림체가 좋았고 창의적인 내용이 많아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여태껏 본 일본 애니메이션이라고는 세일러문 정도밖에 없다. 이 나이에 이 머나먼 나라까지 와서 남자 친구와 일본 만화영화를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나라에서 흥행했던 ‘하트 시그널’의 일본판 버전인 ‘테라스 하우스(Terras House)’를 제외하고 그가 보는 쇼들은 모두 수퍼히어로가 나오는 히어로물들이다. 그동안 민익이 어린이와 함께 본 만화영화들을 간단히 소개해 보자면,  


원 펀치 맨 (One Punch Man)

수퍼히어로가 되기 위해 너무 열심히 훈련을 한 탓에 대머리가 된 주인공이 온갖 괴물들을 한 방에 때려잡는다.


맙 사이코 100 (Mob Psyco 100)

평범하다 못해 눈에 띄지 않는 남학생이 신기가 있어 100% 열 받으면 신력으로 온갖 귀신을 물리친다.


조조의 이상한 어드벤처(JoJo's Bizarre Adventure)

하트 모양으로 가슴이 뚫린 쫄쫄이 수트를 입은 수퍼 히어로들에게 펼쳐지는 이상한 어드벤처.


헌터 X 헌터(Hunter X Hunter)

꼬마 아이가 세계 최고의 헌터가 되기 위해 수련하다 여러 친구들을 사귀고 결국 아빠를 만난다.


원피스(One Piece)

원피스라는 보물을 찾아 떠나는 해적 크루의 모험.


테라스 하우스(Terrace House)

누가 봐도 짜인 각본인데 각본이 없다고 하면서 패널들이 연애하러 나온 주인공들을 관찰하며 신나게 놀린다.



나는 누군가와 만나면서 내가 몰랐던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을 즐긴다.

모든 스포츠를 꿰고 있던 누군가에게 야구의 룰들을 배웠고, 사람들의 신발을 눈여겨보던 누군가 덕분에 신발을 고를 때 좀 더 신경 쓰게 되었고, 고급스러운 먹을 것에 대해 잘 알던 누군가에게는 잘 먹는 법을 배웠다. 내가 몰랐고 관심 없던 분야에 대해 잘 아는 사람과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건 좋은 기회다.


하지만 일본 만화영화에 대해서는 도통 배우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왠지 초등학교 고학년 아들이 보는 프로그램을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엄마가 된 기분이다. 내가 애니메이션 소개를 저렇게 간단히 써 둔 이유도 보는 도중 절반 이상은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집중하려 노력을 해봐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긴다. 온갖 화려한 전투극이 난무하는 만화영화를 보며 이렇게 꿀잠을 잘 수 있는 줄 몰랐다. 이십 년쯤 전에 봤으면 집중해서 열심히 봤을 것 같은데 안타깝다. 민익씨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쇼라며 날 위해 두 번째 봐주고 있다는데 안 그래 줬으면 좋겠다.


하루는 대체 왜 다 큰 남자가 멀쩡한 티비 쇼나 영화는 안 보고 허구헌 날 애니메이션만 보는 건가 싶어서 약간은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왜 티비쇼나 영화는 하나도 안 보고 이런 애니메이션만 보는 거야?



“요즘은 티비에서 하는 쇼들이 재미가 없고, 재밌는 쇼가 있어도 보통 한 시간 정도로 러닝타임이 길어서 보다 보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영화나 러닝타임이 긴 쇼를 볼 때 모든 스토리를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다. 1초라도 방심하다간 나중에 다른 스토리들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으니 보는 내내 계속 초집중 상태로 봐야 한단다.

뭔가를 열심히 보다가도 종종 딴생각에 빠지거나 멍하니 있기도 하는 내게 그의 영상 입력 방식은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다.


한 예로 그와 나는 영화 보는 스타일이 무척이나 다르다.

나는 예고편을 스포일러라고 생각해 웬만하면 예고편은 보지 않고, 포스터의 분위기나 등장인물, 영화 제목이나 감독 등에 따라 영화를 고르는데, 민익씨는 예고편을 꼭 챙겨보고 마음에 드는 영화를 고른다. 나는 영화 시작 후 20분 정도는 예고편 보여주는 시간이라며 느긋하게 팝콘과 스프라이트를 사고 어기적 어기적 상영관으로 향하는데, 그는 그 사이에 혹시라도 영화가 시작했을까 봐 불안해한다. 나는 보는 중간에 이해가 안 돼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데, 그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유튜버가 영화에 대해 정리한 영상을 찾아본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 ‘아, 기분 좋게 잘 봤다!’ 하고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거의 모든 내용을 잊어버리는데, 그는 전반적인 스토리를 꽤 오랫동안 기억한다.


하루는 그에게 내가 반지의 제왕을 3편부터 거꾸로 본 이야기,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을 중간중간 넘겨가며 띄엄띄엄 본 이야기, 덱스터(Dexter) 시즌 1과 2를 보고 너무나 결말이 궁금해 시즌 8로 바로 넘어가 마지막 편을 본 이야기를 3 연타로 해주었다. 그는 내 이야기들을 들으며 도대체 왜 그러는거냐며 진심으로 괴로워했다.


서로가 영상을 입력하는 방식과 선호하는 영상이 다르다 보니 우리의 집 데이트는 둘 중 하나가 양보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불만이 생기는 구도가 되었다.

아들에게 리모컨을 양보하는 어머니처럼 우리 커플의 데이트 콘텐츠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티비 쇼 대신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흘러갔다. 민익이 어린이가 카와시마 짱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는다거나, 베개에 그려진 나가토 짱을 들고 다니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벽에 만화 여자 캐릭터 포스터라도 붙여놨으면 진작 알아채고 도망갔을 텐데, 왠지 속은 기분이다.


미국의 커플들은 주로 집에서 데이트를 한다.

영화관에서 표 두 장과 팝콘, 음료수를 사면 이미 우리 돈으로 10만 원을 육박한다. 거기서 밥을 먹으면 팁까지 포함해서 거의 10만 원이 또 나간다. 영화 보고 밥을 먹는 평범한 데이트를 하는데도 20만 원이 드는 셈이다. 영화를 보지 않고 돈 안 드는 저렴한 데이트를 한다 해도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은 한국에 비해 불편하기 짝이 없고, 맨해튼 내에서 운전을 하려면 도로 위에서 곡예를 펼치는 택시와 경주를 해야 하며, 말도 안 되게 비싼 주차비를 피하기 위해 공짜로 주차할 스팟을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20대나 30대 초반 커플들은 집에서 편하게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면서 배달음식을 시켜먹는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거리에 커플들이 하도 많아서 한국은 커플이 정말 많은 것 같다며 깜짝 놀란다고 한다.


나 또한 이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집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다. 재수를 하며 기숙사에 잠시 살았던 기간 빼고는 늘 가족과 함께 살았고, 집에서 하는 데이트에 대한 개념 자체가 생소하다. 진정한 데이트는 밖으로 나와 맛집도 가고, 볼만한 것, 할만한 것을 하며 돌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나가고 싶어!!!!”



별안간 그에게 통보했다.


그도 내가 그동안 지루해하던 걸 눈치챘는지 의외로 쉽게 동의한다. 노래방도 가고, 여기저기 걸어도 다니고, 맛집도 가고, 영화도 보러 갔다. 데이트마다 지출이 컸고, 그새 편하게 놀고먹고 뒹굴대는 게 익숙해졌는지 돌아다니는 것도 금세 지친다. 등 따시고 배부르게 만화 영화를 보던 시절이 그립다.


그렇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기 전 몇 가지 점검할 사항들이 있었다.

혹시 그에게 동양 여자만 좋아하는 옐로 피버(yellow fever) 같은 페티시가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수사에 착수해 진술을 요구했다. 그는 그에게 상대적으로 아시안 여자가 예뻐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시안이라서 혹은 아시안 하고만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단다. 이번엔 오타쿠 레벨이 지나치게 높아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기진 않을지 구글에 검색해 오타쿠 레벨 테스트도 시켜봤다. 적당한(moderate, 온건한, 적당한) 정도의 레벨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맞추기 테스트도 시켜 보았는데 90 퍼센트가 넘는 정답률을 자랑했다.  


이 정도면 이 아이의 적성이다. 흥미 적성 검사 결과가 명백하게 나왔으니 내가 대처할 옵션들을 생각해야 한다. 도저히 적응을 못하겠으면 헤어지거나,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데이트할 때 각자 다른 취미를 즐기거나(?), 아이의 꿈을 응원하는 학부모의 마음으로 그의 취미를 함께 즐기며 가끔 타협점을 찾는 선택지들이 있다.


고민 끝에 마지막 옵션인 피할 수 없다면 즐겨보기를 택했다. 다시 그의 어두운 던젼에서 애니메이션 보기를 시작했다. 마음의 벽을 허물자 수면제였던 만화 영화들이 흥미롭다. 그 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색감이나 영상미, 스토리 전개, 인물들의 명대사들이 인상 깊다. 특히 헌터X헌터라는 애니메이션은 중간쯤부터 몰입도가 높아지더니 마지막에는 너무나 슬픈 감동 스토리를 선보여 결국 내가 민익이 어린이의 팔을 붙잡고 목놓아 울게 만들었다.


최근 내가 친구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그에게 물었다.



“자기야, 내가 지금 정말 짜증 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여행하는 동안 애니메이션이 너무 보고 싶었어!!!”


“오, 이런... 미안해 허니. 내가 너무 멋진 취향을 만들어줘서.”

 


그와의 협상은 현재까지 성공적이다.

우리는 함께 재밌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가끔은 나가서 활쏘기, 실내 카트 타기, 미니 골프 치기, 실내 암벽등반 하기, 뮤지엄 가기, 동식물원 가기, 게임센터 가기, 레스토랑 발굴하기, 로드 트립 떠나기 등 다양한 모험을 즐긴다. 간혹 서로 원하는 게 다르면 각자 원하는 걸 이야기하고 둘 다 하고 싶은 것부터 한다.


오타쿠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민익씨는 국제적인 이슈나 정치,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트위터나 레딧(reddit, 사회 전반의 소식을 아우르고 개인의 자유로운 의견을 표현하는 소셜미디어)에서 뉴스나 이슈들을 즐겨 본다. 가끔 그는 내게 흥미로운 기삿거리를 보내주는데, 사회가 돌아가는 일에 영 관심이 없던 내게 동기부여가 된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지지하고, 자기의 세계를 확장하며, 각자의 의견을 맞춰가는 과정은 국적에 관계없이 짜릿하다.






그..그렇다고 해서.. 제..제가 오타쿠가 되었단 건 아닙니다만(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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