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욕꼬질이들 Apr 24. 2019

그는 우리 아빠와 닮았을까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8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8

민익씨와 사귀기로 한지 한 달쯤 되던 날 스포츠 펍(sport pub, 스포츠 경기를 보며 술이나 음식을 즐기는 호프집)에서 메이웨더와 맥그리거라는 막강한 복서들이 펼치는 희대의 복싱 경기를 구경하기로 했다.


우리가 찾아간 모든 스포츠 펍은 입장료를 20-30불 정도 받고 있고, 입장을 한다 해도 바 내부에 사람이 꽉 차 발을 디딜 틈이 없다. 경기의 절반 이상은 펍을 찾아다니다 지나가 버리고, 결국은 그냥 안에 있는 티비가 들여다 보이는 펍 앞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표를 사둘걸.



아쉬워하는 민익씨를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우리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웬만한 운동들을 두루 섭렵하신 군인 아버지의 곁에서 그가 시청하는 다양한 운동경기를 보며 자랐다. 자전거 타기부터 볼링과 스키, 수영에 이르기까지 강습 한 번 안 받고 모두 아빠에게 배웠다.

결혼까지 약속했다가 나의 유학 결정으로 헤어진 전 남자 친구는 나의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나에게는 한없이 좋은 분이시지만 우리 엄마에게 조금은 불친절한 시어머니인 우리 할머니와 그의 어머니는 묘하게 닮았고, 도리를 지키고 가족과의 관계와 신뢰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아버지만큼 그는 효자였다. 아버지에게 아직 배우지 못한 당구, 스노 보딩 같은 나머지 운동들을 그에게 배웠고, 중요한 축구 경기가 있으면 찜질방에 가서 건물 지붕이 날아가게 대한민국을 외쳤다.


딸들은 결국 아빠 닮은 남자에게 끌린다고 했던가.

그를 제외하고도 여태껏 내가 만나 호감을 가졌던 남자들은 묘하게 우리 아버지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인간에게는 그동안 살면서 봐 온 이성의 부모님과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단다. 커플이 닮는 것은 애초부터 닮은 사람에게 끌리기 때문이라는 이론도 있다. 인간들이 서로 닮으면 상대방의 외면을 통해 캐치할 수 있는 정보들이 많아져 의사소통이 비교적 수월해지기 때문이라나.


외국인인 민익씨조차 우리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많은지 생각해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동안 만나 온 사람들에 비하면 다른 점이 더 많다.

온갖 스포츠를 즐기는 상남자에 외향적이고 쇼맨십이 강한 우리 아버지와 달리, 민익씨는 내향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천하의 집돌이다. 운동은 하는 것도 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약간은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실행하는 아버지에 비해 그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꼼꼼하며 세심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지막까지 미뤄두기도 한다.



공통점을 생각해보자면,


평소에는 세상 순한 순돌이인데 의외로 운전할 때 보면 약간의 템퍼(temper, 성질)가 있었다. 우리 아빠 차에 탄 것 같다. 반전의 거친 모습에 매력을 느낀 건지 그저 아빠를 닮아 끌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살짝 심쿵할 뻔했다. 황급히 감정 조절을 잘하는 사람이 좋다고 최면을 걸었다. 내가 감정의 노예가 되었을 때 옆에서 나를 진정시켜주는 사람이 나에게 이롭다. 하루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던 전 남자 친구에게 데이트 폭력(폭언)을 당했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그에게 로드 레이지(road rage, 화내는 운전자)가 있었는데 민익씨가 운전할 때 가끔 그 경험이 생각나 두렵고 불편해진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보스턴에 사는 내 가족 중에 한 분이 암으로 돌아가셨다. 갈 방법을 찾다 혹시나 해서 민익씨에게 데려다줄 수 있냐고 물어보니 기꺼이 하루 휴가를 냈다. 4시간 거리를 왕복해 이틀 만에 8시간 운전을 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운전할 때 예전처럼 화를 내지 않았고, 장례식장에서 펑펑 우는 나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로드트립(road trip, 드라이브해서 떠나는 여행)을 떠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칭찬과 감사는 우리 아버지와 민익씨가 공통적으로 먹고 자라는 자양분이다.

나는 틈만 나면 그에게 고맙다고 한다. 미안해할 만한 일이 생겨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한다.

알다시피 그는 최고 난이도 쑥맥이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작은 행동들이나 말 한마디 조차 나에게 감동이 휘몰아치게 만든다.

보통 어느 한쪽이 굉장히 잘해주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와 불만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민익씨는 그저 올라갈 일 밖에 없다.(?)

그가 정말 칭찬받아 마땅하고 나에게 감동의 물결을 선사할 때는 마치 아기가 첫걸음마를 뗀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하루는 그가 물을 마시러 갈 때 나에게 물을 마시겠냐고 물어보고 내 물까지 떠다 줬다.


오 마이 갓. 어메이징. 땡큐 쏘 머치!


누가 보면 엄청난 일을 해 준 것 같겠지만 이것도 민익씨에겐 장족의 발전이다.


언젠가는 통화하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가 불쑥 말한다.


“I like you. Nothing else.” (니가 쩨일 조아!)


요리를 해주면 맛있는 저녁을 해줘서 고마워라고 하며 뽀뽀를 쪽 하고(처음에는 안 했는데 내가 시켰다.) 그토록 싫어하는 설거지를 묵묵히 하러 간다.


물론 아직도 그 개인주의+쑥맥정신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한 예로 자기 음료에만 빨대를 꽂고 마시려고 하길래


우와! 우리 자기 너무 매너 있다. 너무 고마워!!!!


하며 빨대가 꽂힌 그의 음료를 얼른 가져와버렸다.


트레이닝은 시키면 된다. 너무 매너가 좋아 바람둥이 냄새가 나는 남자들보다 나는 민익씨의 방식이 더 좋다.


귀엽게 생긴 애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사랑스러운 말이나 행동들을 툭툭 던지면 유치하지만 고맙고 감동스러워서 깨물어주고 싶다. 화가 난 마음도 사르르 녹는다.


코리안에 가장 비슷하다는 이탈리안의 피를 물려받아 그런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베푸는 낭만파에, 가족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을 최선을 다해 보살펴주고 지켜주려 노력하는 우직한 상남자다.



복싱 경기 보는 자리를 예약하지 않아 슬퍼하는 그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단한 그의 팔뚝에 기대어 말한다.


그래도 끝까지 경기를 봤잖아. 재밌었어.



그가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맞아. 그건 그래. 나도 너무 재밌었어!




단순하다.

우리 아빠 같다.






요즘 우리 둘이 찍은 사진을 보면 묘하게 닮은 것도 미스터리예요.


매거진의 이전글 내 남자 친구는 오타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